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를 읽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열렬한 팬이 되어, 잘 알려진 향수를 비롯해 쥐스킨트의 책을 모두 샀었다.
그게 96년도구나.
그때는 책을 산 뒤 포스트잇으로 산 날, 산 곳, 읽은 날을 적지 않던 때. 머나먼 옛날, 지나간 내 청춘이고나.
이 작가를 열광하며 좋아했는데도, 이 작품집 또한 멋진 단편으로 기억하는 데도, 나는 이 책을 딱 두 번 읽었다. 산 직후, 그리고 최근.
이 작품집에는 단편 3편, 에세이 1편이 실려 있다.
'깊이에의 강요' '승부'는 기억 나지만, 세 번째 단편인 '장인 뮈사르의 유언'과 에세이 '...... 그리고 하나의 고찰'은 전혀 기억이 안났다. 심지어 에세이가 수록되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에세이 '...... 그리고 하나의 고찰'은 그토록 열심히 읽었는데도 내용이 전혀 기억 나지 않는 책에 대한 이야기이다. 쥐스킨트는 어떤 책이 내게 감명을 주었는가, 라는 질문에서 책장을 살피며, 열정적으로 몰입하며 읽은 글이었는데 전혀다시피 내용이 기억 나지 않는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공감가는 이야기가 전혀 기억나지 않은 건, 당시 나는 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때 나는 젊었고, 좋아했던 책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테니까.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다.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티스토리에 몇 번 썼지만, 나는 이제 책과 작별하고 있다. 그러면서 비로소 사놓고 읽지 않았던 책들, 한 번 읽은 뒤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 갔던 책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사놓고 읽지 안/못한 건, 하루에 책 열 권을 살 수 있지만, 하루에 열 권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지.;;;
분명 읽은 책인데 어떤 책들은 진짜 기억이 전혀 안 난다. 내가 이걸 읽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 파트리크 쥐스킨트처럼 열광했던 작가의 글조차...
그렇다면, 쥐스킨트가 에세이에 썼던 의문처럼, 읽기란, 독서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내용은 잊혀도 무언가는 마음에 남을 수 있다. 오래된 책을 다시 읽다, 어, 내가 어떤 화두를 줬던 게 이 구절이었나? 싶은 문장을 발견할 때도 있다. 같은 화두를 다뤘을 뿐인지, 내가 그 문장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몹시도 좋아해서, 그래서 작별을 미루고 있던 이 책을, 다시 읽는데 성공했고, 나이에 견주면 책 상태는 괜찮지만, 구판이라, 알라딘 중고에서 받아줄지,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다.
그냥 버리기에는 가슴이 아프고, 누군가에게 읽어 보라고 주고 싶은 책이기는 하다.
그러나 내 주위 사람들 다 나처럼 안/못읽은 책이 수두룩한 사람들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바랄 수도 있지.
어차피 일간 지인들에게 택배로 보낼 게 있으니, 받을 지인 중, 이 책 원하는 분? 하고 물을 수도 있다.
택배료가 좀 더 들겠지만...
요즘 나는 10원 한 장도 아껴야 하는 처지라서 말이지. ...
알라딘 중고 매장에서 안 받아주면, 이미지 오려서 다꾸해? 어차피 재활용, 종이로 작별할 거면 그게 낫지 않아?
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책을 분해하는 건, 그것도 사랑하던 책이라면, 망설여지는 것이다.
재활용으로 내놓는 것보다, 이쪽이 더 마음 아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 작업물들도 많이 버려졌겠지? 앞으로도 버려지겠지? 중고로 팔려 나가기도 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면 또 마음 복잡해지지만...
읽고 작별하기로 하다 보니, 오히려 아끼는 책, 좋아하는 책이 안 읽히는 것 같다.
어차피 한 생에 읽을 수 있는 책은 한정되어 있다면 좋아하는 책부터 읽어야 하는데 말이다.
어떻든, 필연적으로 다가올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소유도 무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