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오기

유코 히구치 전 - 24.10.19.

운가연 2024. 10. 20. 19:12

 

 

ㄴㄹ와 여의도 더 현대에서 유코 히구치 특별전을 보고 왔다. 탐미적이며 정밀한 선노동 그림을 그리는 작가였다. 엄청 정밀하게 그리는데 그림이 꽤 작았다. 손바닥만 한 그림들도 제법 되었다.

 

우린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눈 안 아프나?" "노안 안 왔나?" "확대경을 놓고 그리나?" "시력이 좋은가?"

 

중년이 되어도 노안이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책 읽고, 컴터 많이 써도 타고난 시력이 버텨주는 것이다. 유코 히구치는 어떤 쪽일까? 우린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다. 깔깔-

 

노안이 온 나는 그림을 자세히 감상하기 위해 돋보기로 바꿔 꼈다.

 

선노동 그림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큰 자극이 되어 주었다. 그래, 선 노동 그림을 그리려면 저 정도로 집요하게 그려줘야지.

 

유코 하구치는 자고 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팀 버튼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심지어 미팅할 때도 그림을 그리면서 한다고 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게으름도 한 몫하지만 이상하게 낙서가 안 된다는 게 문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빈 종이 앞에서 그냥 막막해진다. 뭘 보고 그리는 건 돈과 시간을 써서 배우고 익히며 어찌어찌 어느 정도 가능하게 만들었는데 그냥 가벼운 선 몇 개 그리는 것조차 어렵다. 그냥 막막하다.

낙서도 훈련해야 늘겠지만, 그것도 최소한의 감은 올 때 이야기다. 다들 그냥 그리라는데, 막연하게 어려울 것 같아서 안하는 거 아니다.그림 좋아하고 배워도 보고 교재도 사 보고 어쩌고 해 온 세월이 있다. 진짜 어렵다, 나는.

유코 히구치 전시회를 보고 와 문득 이러저러하게 그려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진이나 눈앞에 있는 사물을 참고도 하며 낙서에 도전해 보았다. 뭔가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다. 갸아-

 

그리고 낙서를 하며, 선노동 그림은 시력이 허락하는 한 작게 그리는 게 좋다는 생각도 새삼스레 했다. 크게 그리면 그림이 안 끝나. 깔깔-

 

 

 

 

 

 

낙서라고 해서 꼭 상상력으로만 그려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필요하면 주변 사물이나 사진 참고도 하자. 보고 그리지 않으면 눈앞이 하얘져도 그릴 수 있는 걸 그려보며 상상으로 그리는 것 또한 계속 노력 해야 한다. 

 

그림을 완성시키는 동영상이 있었는데 큰 틀만 잡아두고 부분적으로 완성해 나가더라. 나도 요즘 이 방식 쓰는데, 맞아, 꼭 전체를 그리며 다 같이 완성해 갈 필요는 없어. 모두 자기 방식이 있는 거야. 당연한 건데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조금만 더 하면 이 막막함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단계 도약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가끔, 어쩌다, 조금, 자주, 많이 답답하지만, 힘내 보자. 그림 그리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덧 : 전시 후 도록을 살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금박을 입힌 판화는 몹시도 아름다웠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껏 산 도록처럼 책장에서 먼지만 쌓일 것 같았다. 그래서 눈에 많이 담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