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을 먼저 보고 "미드소마"를 봤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둘 다 같은 감독, 아리 애스터 작품이고, 미드소마가 유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거니까.
'유전'은 부모의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지는 그 유전이라는 뜻이다.
줄거리를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을 터라, 본 사람만 알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지금 막 '미드소마'를 다 봤고,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두서없는 글을 남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 중 정서적으로 가장 기괴했다."
'유전'과 '미드소마' 둘 다 공포영화 치고는 무섭지 않다. 그러니까 흔히 공포영화에서 있는 깜짝 놀라게 하기, 가 거의 없다.
1.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1) 가족을 잃은 자의 절규
유전에서는 딸을 잃은 어머니가 지르는 비명, 미드소마에서는 가족을 모두 불시에 잃은 딸 대니의 비명이 청각적으로 흡사하다. 진짜 내장을 쥐어뜯는 듯한 절규다.
2) 배우를 예쁘게 찍지 않는다.
보통 영화에서 배우들을 예쁘게 찍으려는 것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다.
'유전'에서 죽는 어린 딸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고, 딱히 스스로를 꾸미지 않는다.
'미드소마'의 여주인 대니도 헐렁한 면티에 면바지, 배우치고는(?) 통통하다.
남캐들도 마찬가지. 최대한 평범하게 찍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3) 여캐의 이름이 남자 이름이다.
'유전'에서 죽은 어린 딸의 이름은 찰리, '미드소마' 여주 이름은 대니, 둘 다 대체로 여자에게 붙이는 이름은 아니다.
4) 둘 다 절반 즈음에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간다.
'유전'의 여주(?)는 어머니를 여읜 뒤,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자신에게 낯설음을 느끼며 고민하다,
미국에서는 많이들 하는 것 같은,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모임에 찾아간다.
불시에 딸을 잃은 뒤에도 마찬가지.
여기까지는 나름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모임에서 만난 여자가 갑자기 강령술을 권하면서 이야기 구도 급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을 정도.;;;
'미드소마'도 여주의 여동생이 조울증을 앓았다. 그리고 부모를 살해하며 자살한다.
동반자살이라는 해석도 있던데, 나는 부모를 죽이면서 자살한 것으로 보였다.
한꺼번에 가족을 잃은 상실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나 어찌어찌 일상을 살아가던 중,
남친/남친의 친구들과 스웨덴으로 여행가게 되면서 분위기 급 반전.
5) 가족/연인처럼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해줘야 하는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철저한 타인이다.
'유진'의 여주는 남편에게 자기가 미친 게 아니라고, 자기 말을 믿어달라고 애걸한다.
모임에 나가며 영화를 보러 가는 거라는 둥, 거짓말을 해온 그녀가 진실을 말했지만 남편은 그녀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 믿지 않은 게 맞는 건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시신을 다락방에 숨겨둔 건 정말로 그녀일 수도 있다.
물론 죽은 어머니의 조력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린 딸이 죽은 건 누구의 책임인가?
가기 싫다는 파티에 억지로 보낸 어머니(여주)?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여동생을 내팽개친 오빠?
둘 다 상대를 탓할 뿐 자기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죄하지 않는다.
'유진'에서 가장 기괴했던 장면이다.
어린 딸이 죽었다. 그런데 그냥 일상이 이어진다. 예상했던 자책과 비난은 아아아아주 나중에야 나온다.
죄책감에 짓눌린 채 겉보기로는 평범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기괴함이라니......
'미드소마'의 남친은 지극히 우유부단하며 현실적인 인물이다.
가족 문제로 괴로워하며 종종 하소연하는 여친이 부담스럽다. 헤어질 용기는 없다.
스웨덴에 한 달 반 정도 친구들과 자료 조사 겸 여행을 가고 싶은데,
얼마 전 가족을 잃은 여친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다.
비행기 표까지 끊어놓고 여친이 우연찮게 알게 되자, 안 갈 거라고 한다. ...
충격받은 여친을 달래기 위한 방법으로 같이 가자고 한다. ...
친구들에게는 여친에게 같이가자고 했고, 여친은 친구들이 권한 걸로 아는데, 여친이 간다고 답은 했지만 안 갈 거라고 한다. ..... 머라고?;;;;;
암튼 이 남친은, 그렇게 간 스웨덴에서, 무언가 이상한 기미를 감지하고 말하는 여친에게 '영혼 없는 공감 토크'를 시전한다.
유일하게 상냥하고 다정한 존재로 나왔던, 남친의 친구는, 사실 자기 친구들을 제물로 삼으려고 데려간 거였다. 갸갹;;;;
6) 주변인물들이 난데없이 나신;;으로 등장하는데 섹슈얼한 면은 조금도 없다.
나체, 벌거벗은 모습,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 그런 의미일까?
2. 미드소마 이야기를 좀 더.
'미드소마'는 검색 결과 스웨덴에서 매년 6월 중순에 열리는 하지 축제를 뜻하고, 스웨덴 어로 '한여름' 이라고 한다.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 백야라서 밤이 4시간 정도 밖에 오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포 상황이 낮에 벌어진다는 거다.
인간은 정보의 대부분을 시각에서 얻는다. 그래서 공포영화의 배경은 대부분 밤이거나 전등이 나가거나 뭐 그러하다.
볼 수 없다는 것,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정보를 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 자체가 공포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낮이라, 상황이 무서운 게 아니라 심리가 무섭다.
잠깐 '유전' 이야기를 하자면, 가장 무서운 장면은, 여동생을 데리고 병원에 가던 중, 숨 쉬기 힘든 여동생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밖으로 뺐고, 도로에 죽은 사슴이 있어 놀란 오빠가 차를 틀었다가 나무를 스치고, 그 스친 나무에 여동생의 목이 잘린 뒤 ㅠ 십대 오빠는 현실에서 도피하며 그대로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다가올 일에 대한 공포로 뜬눈으로 밤을 보낸 뒤, 잠에서 깨어난 가족의 평범한 대화에 이어 시신을 발견한 어머니의 절규를 침대에서 누워서 듣는 장면일 것이다. 으악;;;
가장 두려운 건, 나를 죽이려 하는 악령이 아니라, 내가 저지른 일과 그 일의 결과, 일 지도.........
그러고 보니 이 '오빠'의 회피 성향의 확장형이 '미드소마'의 '남친'인 걸까. 흐음...
중심 인물 중 한 명인 펠레는 스웨덴의 소규모 공동체 출신이다.
여름 축제에 인류학과인 친구들 + 여주를 데려간다.
이 마을은 일반 차로는 못 가고, 트럭이 없으면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으며,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산다.
나이에 따른 역할이 정해져 있고, 72세가 되면 자살해야 한다. 그걸 순환이라고 한다.
마을 내 다른 친구를 따라 온 미국인 커플은 늙은이 두 명이 자살하는 모습에 경악한다.
다들 미쳤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무심하게 의식을 계속한다.
72세가 된 사람은 두 명. 절벽에서 스스로 떨어져야 한다.
머리가 부서지며 죽어야 하는데, 한 명은 정확히 아래에 있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다른 한 명은 다리부터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도 멀쩡하고 즉사를 안 한다.
그러자 살인이라고 발악하는 커플들에게는 무심하던 마을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그 사람 머리를 커다란 나무 망치로 깬다.;;;
이 마을의 이 기괴한 풍습, 왜곡된 행복은 어디서 올까?
'유전'에서는 말 그대로 '유전'이라면, 이 마을은 '약물'에 의지한다.
하지만 약물로 통제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 다리부터 떨어진 사람은 죽기 싫었던 거다. 무서워서 다리부터 떨어진 거다.
9인의 희생제가 대단원의 막인데, 희생자 중 마을 사람 하나가 막판에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른다. 죽기 싫어! 이거 뭔가 이상해!
그러니까, 이건 이상한 거다. 감독은 전통이라고 이 마을을 미화할 의도가 조금도 없다.
외부인만이 아니라 내부인도 희생시킨다고 해서, 나도 72살이 되면 저기서 기쁘게 뛰어내릴 거야, 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 일이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거다.
약효와 태어날 때부터 가해진 세뇌조차도 죽음의 공포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전반적으로 왜곡된 가족애의 극단을 보여 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가족이 가족에게 가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해, 가스라이팅의 극치.
이 공동체는 가장 내밀해야 하는 남녀가 관계하는 순간마저 함께하고,
첫 관계에 다소 두려워하는 여인을 달래는 건, 함께 관계하는 남자가 아니라 - 남자는 그러려고 했는데 -
동석한 여자 중 한 명이고, 오르가즘도 다같이 느끼고,
그리고, 정말 괴악했던 장면이;;;; ............... 이 부분은 직접 보세요. 갸갹;;;
여주가 절망에 휩싸였을 때조차 마을 여인들이 그 감정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 공유는 기괴하다. 너님들이 만든 절망이다. 그거 공감 아냐. ......... 그거 위로 아냐. .......
사생활을 넘어서 오롯이 자기 자신의 감정 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극단의 공동체.
꽃으로 둘러싸인 여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치장.
탈진하도록 춤을 춘 여주를 판자(?) 위에 서 있게 하고 걸어가는 사람들. 발 삐끗하면 떨어져서 다칠 텐데?
기괴하고 기괴하다.
내 리뷰는 이 영화의 기괴함을 백만분의 1도 담지 못해서 슬프다.
진짜 기괴하고 기괴하고 기괴한 영화였다. 지금 거의 제정신이 아님.;;
마지막 여주의 웃음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했다.
여주의 웃음은 밝고 따뜻한 느낌은 아니다.
다소 섬뜩한 웃음이다.
여주는 이전에 대마초를 해 본 적이 없다.
이 마을에 오는 길에 처음 하는데, 그때 자기 다리에서 풀이 자라는 환영을 본다.
마을에서 두 번째로 환각제를 마셨을 때도 비슷한 환상을 본다.
그건 여주가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리라는 암시다.
여주는 늘 부유해왔다.
조울증을 앓는 동생으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확실히 나오지는 않지만 부모와 가까웠던 것 같지도 않고,
어쨌든 가족이 다 죽었다.
늘 가족일로 하소연하는 자신에게 남친이 싫증나 헤어지자고 할까 염려하고,
남친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들어주는 친구는 타인이 해줄 수 있는 평범한 조언을 해줄 뿐, 여주를 진정 안심시키진 못한다.
마을에 도착한 첫날 밤, 남친과 남친의 친구들이 자기가 자는 동안 자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꿈을 꾸고,
펠레 또한 여주에게 남친이 널 단단히 붙잡아준다는 느낌을 못 받지 않느냐고 했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와서, 5월의 여인이 되고, 9인의 희생자 중 한 명을 택할 권한이 생긴다.
마침내 을에서 갑이 되는 것이다. 힘이, 결정권이 자기에게 온 것이다.
그러나 9인 중 한 명도 일종의 제비뽑기로 결정되는 것일 뿐이고,
72세 이전에 자연사해야 이 마을에서 주어지는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왜곡되고 불안정한 행복이지만 말이다.
상식적인 사람들 - 살인이라며 경악한 미국인 커플 -,
다른 궁리가 있던 사람 - 남친 일행 중 하나, 사진 찍지 말라고 한 책을 찍음 -,
마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 - 조상들의 나무에 소변 보고, 중요한 행사 전에 졸리다고 자러 가고 -,
그저 수동적으로 끌려간 남친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외롭고 상처받은 이였기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느낌을 받아왔기에,
왜곡되었을 지언정 강력하게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이 마을의 규칙을 진정 받아들일 수 있던 여주는 마을의 진정한 일원이 된다.
하나 이것은 근친상간을 통해 장애인을 탄생시키고, 그 아이의 고통을 미화하며 자양분 삼듯 뒤틀린 소속감이다.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모든 사람의 행복의 대가로 감옥에 갇힌 아이가 문득 떠오른다.)
마을의 어른 중 하나는 근친상간이 일어나느냐는 질문에, 그런 일은 없다는 거짓말도 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정교하게 계산한 근친상간으로 인한 장애인을 한 세대에 한 명씩 만든다.
이 마을은 진실된 곳이 아니다.
상처받은 이들을 이용해,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이 마을은 계속 운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