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그림을 그린 건 19년이지만 이 스케치북을 선물받은 건 그 전이다. 날짜는 기록에 없다. 보통 기록해두는데 어쩌다 빠졌네.
오래도록 좋아하고 가깝게 지내온 지인이 내게 소소한 부탁을 두어 가지 했다.
그 보답으로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고 나는 몰스킨 스케치북을 택했다.
몰스킨은 고흐가 쓴 브랜드라 명성을 얻었다.
고흐는 생전에 가난하게 살다 죽었지만, 스케치북 회사는 고흐 덕에 입지를 굳혔다. ... 자본주의가 그렇지. ...
그래도 고흐가 괜히 고른 건 아닌지 그림 열심히 그리는 친구 왈, 몰스킨이 시간이 흘러도 종이 변색이 없다고 했다.
지인은 표지에 글자를 새겨주는 이벤트를 하는 온라인 판매 사이트를 링크해줬고, 나는 뺭이 이름을 새겨달라고 했다.
뺭이 외동 시절이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은 뺭이를 탁묘 보내고 갔던 첫 여행이기도 했구나.
어떤 물건에는 추억/기억이 깃든다.
이 스케치북을 선물했던 지인과는 몇 년 전 관계가 단절되었다.
당황스럽고 안타깝고 슬프고 화가 났던 일이다.
지인은 외국에 살아서 우린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채팅이기에 아마도 기록을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
흐릿해진 건 흐릿해진 대로, 변형된 기억은 변형된 대로, 적어내린다.
하루는 이 지인이 내게 몹시 센 표현을 썼다.
sns 등에 글을 올릴 때 이따금 센 표현을 쓰는 걸 봤지만, 내게 직접적으로 그런 표현을 쓴 적은 없었다.
- 참고로 육두문자는 아니었다.
며칠 뒤 나는 그 일에 대해 항의했다.
내 예상은 지인이 사과하면, 나는 받아들이는 거였다.
그런데 지인이 더 세게 나왔다. 방어적인 공격처럼 느껴졌다.
나도 순간 감정이 치밀여 따졌다.
그러자 지인이 강도를 높였다.
순간 마음이 식으며 서너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지인은 300보 뒤로 후퇴했다.
쉽게 쓰자면 이렇다. 나는 공격적인 반응에 당황했고, 마음 상했고,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바쁠 땐 몇 달 씩 대화 못하기도 했다. 며칠~몇 주 지나면 괜찮아리지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지인이 당분간 보지 말자고 했다.
자기는 절대 화난 게 아니라며, 영어로 무슨 단어를 말하며 - 까묵음;; - 우리말에는 딱 맞는 게 없는데
지금의 격한 감정들이 모두 다 지난 일이 될 때까지 잠시 보지 말자는 이야기였다.
지금도 말 끝에 붙던 ㅎㅎ 가 기억난다.
그렇게 끝났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다.;;;
나는 굳이 그렇게 해야하느냐는 입장이었고, 그 지인은 절대 나에게 화나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했다.
나로서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화나서 절교 선언하면 문제고, 화가 나지 않은 절교 선언은 문제가 아닌가?
본질은 절교잖아.
시간이 많이 흐른 뒤, 그 지인이 한 말이 말 그대로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뒤 보자는 말이었다.
물론 나도 마음 속에 같은 생각이 있었다.
며칠 혹은 몇 주, 혹은 몇 달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오프에서는 만나기 힘들고 온라인 대화로 이어져온 관계인데다 실제로 피차 바쁘면 몇 달 씩 대화 없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건 다르다.
심지어 명확한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들은/받은 입장에서는 달리 만류/거부할 도리가 없는,
기약없는 거리두기를 하자는 일방적 선언/요구는 완전한 절교 통보와 다를 게 없었다.
그 지인의 말대로 시간이 흐르자 그때 격했던 감정들은 덧없는 과거가 되었다.
그 지인에게, 먼저 선언한 사람이 사과와 함께 먼저 다가와야하는/거리두기를 끝내야 하는 거라고 말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었지만 그 또한 지나갔다.
그 지인을 좋아했던 감정, 다소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있던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 또한 흘러가버린 강물로 사라졌다.
살면서 허망하게 사라진 인간관계가 어디 그 사람 하나 뿐이었으랴...
스케치북은 스케치북으로 남았고, 다 쓴 스케치북 일기 쓰려다 보니 문득 떠오른 일화일 뿐이다.
주로 여행 때 가지고 다녀서 군산에 가서도 그렸다. 군산 전에 공주도 갔는데, 공주 그림 중에는 마땅히 건질 게 없어서 건너 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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