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팡이 사태를 맞으며 집을 구석구석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책과 작별하기로 결심한 일기'에서 썼듯, 책과 작별하기로 한 건 내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책과 작별하기로 했는데, 작별하지 못할 물건이 있을까.
해서 방 곳곳에 숨겨져 있던 추억이라는 이름 하에
존재조차 잊고 놔두었거나, 그저 버리기 아까워서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상당히 정리했다.
그래서 더는 버릴 물건이 없을 줄 알았다.
천천히 책과 작별하면 되려니, 했는데 오산이었다.
2. 팡이 사태를 맞이하며 버려야 할 물건이 산더미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전에 버린 건 새 발의 피였다.
21년에 덧없는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하며 넷플릭스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프로그램을 봤었다.
거기서 기억에 남는 말이 "추억이 깃든 물건은 잘 보이는 곳에 두라."였다.
잘 보이는 곳에 둘 게 아니면 작별하라는 소리였다.
그냥 구석에 방치된 채 먼지만 쌓여가는 물건은 추억이 아니다.
좋게 말해 봐야 미련, 대놓고 말해서 게으름에 불과하다.
하나 하나 작별하기 시작했다.
뭐 버릴 게 있어서 샀다가 계속 방치되던 20리터 쓰레기 봉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참고로 나는 5리터 쓰레기 봉지를 썼다.
우리 동네에 파는 곳은 한 군데 밖에 없다. 보통 10리터 부터 있음.
비닐, 플라스틱 등 재활용 버리고 나면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릴 게 많지 않았다.
그러다 팡이가 자생한 장롱 속을 점검하며, 덧없는 물건들을 버리느라 75리터 쓰레기 봉투 2개가 쓰였다.
이후 한 구역씩 팡이 수색을 하다 보니, 아예 안 쓰는 물건들이 부지기수였다.
아까 오후에 75리터 쓰레기 봉지 하나가 또 사라졌다.
그렇게 버리다 보니 감춰져 있던 물건들, 버려야 할 것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3. 오늘은 무려 2008년 후반에서 2009년 초까지 쓰던 수첩을 버렸다.
몇 페이지만 뜯어내서, 다른 이미지는 하나도 쓰지 않고 다꾸를 했다.
사진을 찍은 뒤 사이사이에 일기를 썼다.
2009년은 내가 지금 일을 전업으로 하겠다고 결심한 해이다.
한 때 해마다 종이 다이아러를 샀었다.
다이어리를 꾸며 보겠다고 이거저거 붙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꾸밀지 감도 안 오고 해서,
할 일들을 휘갈겨 쓰다 영화나 공연표 하나씩 붙인 정도다.
아, 이 영화 참 재밌었지, 하는 표도 있었고, 무슨 영화인지 기억도 안 나는 영화도 있었고,
제목 정도만 기억 나는 영화도 있었다.
오디션은 뮤지컬로, 뮤지컬 덕후인 친구가 보러 가자고 해서 봤던 거.
즐겁게 본 기억이 난다. 그날 있었던 일들도 몇 가지 생각난다.
다이어리를 쓰지 않은지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다꾸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튜브, 블로그 찾아가며 한참 열심히 했었다. 그게 아마 2~3년 전.
요즘 다시 다꾸에 재미를 붙였다. 말이 다꾸지 그냥 '그림 일기' 같은 느낌이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면 한 쪽, 혹은 양면을 꾸미는 정도.
저보다 오래 된 다이어리가 잔뜩 있다는 거. ....
중고딩 때 산 다이어리도 아직 있다고. ㅋㅋㅋㅋㅋ
다이어리를 버리지 않은 건, 내가 자기애가 강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 기록, 나 자신을 버릴 수 없었던 거.
그리고 이제는 다꾸를 버리지 못하겠지. 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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