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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치기

불광천, 초봄, 친구들과

by 운가연 2023. 4. 17.

일요일 낮. 단톡방이 울렸다.

 

ㄴㄹ : 다들 오늘 컨디션 어때?

ㅈㅁ : 난 갠춘.

나 : 양호.

 

즉석에서 모이기로 함. ㄴㄹ가 불광천 벚꽃 축제 때 받은 할인 쿠폰도 기한 지나기 전에 써야 했다.

 

그리하여 4시, 응암에서 집합했다.

 

불광에서 유명한 겹벚꽃

ㄴㄹ가 한 나무를 가리키며 "불광천에서 유명한 겹벚꽃이야." 라고 말했다.

과연, 벚꽃이 모두 진 자리에 홀로 휘황한 진분홍을 가득 매단 나무는 눈길을 확 끌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는 아이와 벚꽃을 담았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도 사진기를 꺼내들었다.

우리도 안 찍을 수 없지! 이 각도, 저 각도 찾으며 열정적으로 찍었다.

겹벚꽃은 카네이션처럼 얇은 꽃잎이 겹겹이 피어 있었다.

벚꽃도 화려한데, 겹벚꽃은 화려함에 화려함을 입혔달까.

사치스러운 느낌을 주는 꽃이었다.

 

목적지 없이 걸었다.

벚꽃은 모두 졌지만 개나리, 라일락, 철쭉, 벚꽃보다 늦게 피는 겹벚꽃이 피어 있었다.

불광천은 물, 꽃, 나무를 다 볼 수 있는 곳이었다.

 

ㄴㄹ : 사람은 초록과 물을 보고 살아야해. 햇빛도 쬐고.

 

맞는 말이다. 하루치 작업을 마치고 산책하느라, 주로 밤에 걸어서 낮에 보는 꽃들이 찬란했다.

 

걷다 보니 겹벚꽃들이 더 보였다. 처음 겹벚꽃이 제일 유명한 건, 홀로 외따로이 떨어져 있어 녹색들 사이에서 찬란한 꽃을 피워 군계일학인데다, 다른 겹벚꽃들은 연분홍인데 드문 진분홍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연분홍 겹벚꽃

 

따스하고 한가한 풍
민들레 홀씨 무리

어릴 때는 민들레 홀씨만 보면 꺾어서 후~ 하고 부는 재미에 흠뻑 빠졌었다.

이젠 그러지 않는다. 눈으로만 감상한다.

 

불광천

이번에 사진을 올릴 때는 아이폰 보정 기능을 썼다. 채도는 너무 많이 올리면 인위적으로 보정한 티가 나지만 명도와 휘도는 올리니 사진이 밝아보이더라. 날이 흐렸던 터라 보정 기능이 쏠쏠했다.

 

이 사진은 보정을 많이 했다. (TMI;;)
꽃과 물과 나무나무.
라일락

걷는 건 좋지만 마스크로 인해 풀과 꽃, 나무 내음을 맡지 못하는 건 아쉬웠다.

야외 마스크 의무는 해제되었지만, 그래도 쓰는 게 피차 안전할 것 같아서 나는 쓴다.

 

ㄴㄹ가 마스크 벗으면 라일락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이 없을 때 잠깐 마스크를 벗고 코를 가져다 대었다.

라일락 향과 기억이 훅 밀려왔다.

어릴 때 살던 집 마당에 라일락이 있었다. 봄이면 라일락 향기를 맡고는 했다.

잊고 살던 향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라일락은 5월에 피는 꽃인데, 온난화로 인해 일찍 피게 되었다고.

 

나 : 잠깐, 그러니까 원래 4월은 지금보다 추웠던 거야?

ㄴㄹ, ㅈㅁ : 그렇지.

 

헐... 나 추운데. ㅠㅠ

 

나가기 전 ㅈㅁ이 넘 두껍게 입어서 덥다는 카톡을 보냈다.

ㄴㄹ는 저녁이 되면 네가 승자일 거라고 했다.

나는 ㅈㅁ 카록 보고 얇게 입었다.

바람이 불자 겁내 추웠다. ㅈㅁ이 승자였다. ㅋㅋ

 

풍경만 따뜻해...

불광천 가까이 살면 좋겠지만, 가까이 살면 사진 안 찍겠지. 산책해도 일기는 안 쓰겠지. ...

 

진달래가 가고 나면 철쭉이 핀다.

철쭉은 꽃도 크고, 꽃잎 끝도 날카롭고, 색이 너무 진해서, 가까이에서 보면 무서울 정도다.

보정 1도 안했는데 저 색감이 나온다.

 

인도를 뚫고 나온 새싹.
이 꽃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불광천에 있는 다리 중 하나.

ㅈㅁ, ㄴㄹ는 교복 친구다. 학교 다닐 때야 자연히 자주 봤고, 성인이 된 뒤에도 한동안 생일을 챙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뜸해져 몇 년 안 보다가, 최근 시기가 맞으며 자주 보고 있듯이, 

피차 꽂힌 곳에서 사진을 찍느라  때로 거리가 벌어져 각기 걷다가, 합류하기를 반복했다.

 

ㅈㅁ이 사진을 잘 찍어서 나는 몇 번인가 ㅈㅁ이 찍는 구도를 스토킹했다. ㅋㅋ

 

ㅈㅁ : 인스타에서 사진 잘 찍는 사람 팔로우하면서 구도를 익혀.

나 : ...... 그런 귀찮은 일을 할 리가 없잖아. ...

 

이따금 ㄴㄹ가 알려주었다.

 

ㄴㄹ : ㅈㅁ이 여기서 찍는다. 빨리 따라 찍어!

나 : 오케!

ㅈㅁ : 낄낄

 

슬슬 허리가 아파왔다. 20대 때는 오래 걸으면 다리가 아프다.

30대 중반이 지나면 허리가 아프다. .....

 

ㄴㄹ : 쿠폰 쓰자! 벤조롱 쿠폰 쓸 수 있대.

나, ㅈㅁ : 가즈아!

 

벤조롱이 뭐하는 곳인지 모름. ...

근데 본디 평일에 하루 쉬던 곳이 일요일 휴일로 바뀌었다고.

 

ㄴㄹ : 든든당 가자!

나, ㅈㅁ : 가는 거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 든든당도 일요일 쉼.

 

ㄴㄹ : 프라이드 치킨 가자! 아까 지나칠 때 보니 열었더라.

나, ㅈㅁ : 치킨은 진리!

 

다시 180도 돌아서 걸었다. ..... 닫았다.

 

ㄴㄹ : 내가 잘못 봤나봐. ㅠ 오늘은 날이 아닌갑다. 아무데나 가자!

나, ㅈㅁ : 콜이드아앗!

 

그래서 우린 '해피송'이라는 동네 호프집에 가서, 치킨과 골뱅이 세트를 시켰다.

 

이런 메뉴판. 치킨과 골뱅이 세트. 20년 만에 보는 기분이다.

'호프집'에 들어가는 것도, 골뱅이를 시키는 것도 진짜 오랜만이었다.

지나가버린 20대 때 단골 메뉴가 생맥주와 골뱅이였는데.

 

 

프라이드 치킨은 얇은 튀김옷에 바삭하니 맛있었고, 골뱅이도 푸짐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온갖 잡수다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잡수다 1.

 

나 : 쟈철에서, 누가 자리 양보해줘서, 그날 입은 원피스 처분함. ㅠ

ㄴㄹ : 좋은 거지. 그건 팔/다리는 날씬한데 배만 나왔다는 거잖아.

나 : 그게 좋은 거라고라고라고라?!

ㄴㄹ : 그렇다니까, 잘 들어 봐, 네가 팔이랑 다리는 날씬한데(강조), 배만 조금(강조) 나온 거야.

ㅈㅁ : ㄴㄹ야, 그만해야 해.

나 : 잘 말했다, ㄴㄹ 좀 말려!

 

엉엉 우는 나를 설득하던 ㄴㄹ가 마침내 깨달아 말했다.

 

ㄴㄹ : 팔, 다리 말랐는데 배만 나왔으면 E.T구나.

ㅈㅁ : .... 나 그 말 안하고 있었는데. ...

나 : ㄴㄹ 어케 좀 해 봣! 날 두 번 죽이고 있어! ㅠㅠㅠㅠㅠ

 

잡수다 2.

 

ㅈㅁ : 나는 반대 경험이 있음.

           피곤한데, 산모가 짐까지 들고 앞에 서 있어서 양보하려니까 "아니에요!" 하고, 급히 내 앞을 떠났어.

나 : 난 심지어 왜 양보해주는지 모르다가 나중에 깨닫고오오오 ㅠㅠ

 

양보한 사람이 훈남이라 심쿵했던 건 비밀. ............

 

잡수다 3.

 

ㄴㄹ : 우리 집 위치가 딱 중간이라 만날 때는 내가 개이득.

나 : 거럼, 누군가는 이득 봐야지.

 

이게 뭐라고 3분간 이 화제로 이야기하며 빵 터졌는지는 술만 알겠지. ㅋㅋ

 

그 외, 지나치게 사적이라 아무리 익명의 티스토리라도 올릴 수 없는 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어섰다.

 

돌아가는 길에도 사진 찍기는 계속되었다.

나 : (걷다가 문득) 개천 넘 예쁘지 않아?

ㄴㄹ : 노가리가?

 

하필, 붉은 글씨의 노가리 간판이 반사되었던 거.

 

ㅈㅁ : 개천에 반사된 조명이 예쁘다는 거잖아. (굳이 설명함.)

ㄴㄹ : 그러니까, 노가리가?

나 :  흐꺽꺽 (웃다 주금.)

 

2011년에 초안을 시작해,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작업한 일 하나가, 몹시 가슴 아프게 마무리되었다.

좋은 기회를 잡았던 만큼 잘해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에 마음이 힘들었다.

칭구들에게 위로도 받고, 신나게 웃고 떠들며, 무심히 흐르는 개천물에 흘려보냈다.

비어버린 시간에 다른 작업을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여행을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케세라세라, 친구와 한 잔 술과 꽃이 있는데, 인생 뭘 걱정하랴. (23.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