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숙의 갈채는 고딩 시절 날 열광하게 만들었었다.
완결이 난 뒤에 본지라 한꺼번에 빌려봤는데, 한동안 갈채 이야기만 했을 정도였다.
만화 대여점 시대가 저물고, 옥션에서 이 시절 만화들 경매할 때 통장 엄청 털어 사모았었다.
갈채도 그때 구입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사고 나서는 다시 읽었을까?
소유하는데 만족하지는 않았을까?
심지어 갈채 1부는 진짜 초판, 만화 대여점을 아는 이들은 기억할 빨간색 초판까지 가지고 있었다.
두 질을 다 가지고 있을 건 없다, 는 결심하에 1~2년 전 만화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이 갈채 연작과도 곧 작별할 예정이다.
마지막 갈채 4권이 없다. 처음 구입했을 때부터 없었을까, 이사 과정에서 분실한 걸까?
그조차 기억이 안난다. 덧없는 소유욕을 증명하는 것 같다.
어린 시절 기억과 주워들은 말에 의지하자면, 김영숙은 김영숙 군단이라고 해서 많은 문하생으로 엄청난 다작을 했다. 할리퀸 식의 뻔한 로맨스부터, 판타지, SF까지 여러 장르물을 그렸다.
또한 표절과 영향을 받았다, 의 경계선상에 있는 작가기도 했다. 주로 일본만화.
나도 간혹 "어? 이 컷은 일본 만화에서 본 컷인데? 이 설정 다른 만화에서 봤는데?" 싶은 게 있었다.
어쩌면 각색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는지도.
마지막 갈채에서 오셀로 각색은 지금 봐도 멋졌고, 동상으로 만들어진 샨의 친구, 그러니까 그 동상이 갑자기 쓰러지며 위기에 처했던 유리를 구한 장면이나, 확실히 당시 내가 왜 이 만화에 열광했는지는 알게 해주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중 김영숙의 색채가 드러나는 건, 주로 SM틱산 만화들이었다.
여장남자라는 설정으로 BL을 가린 갈채, 도시의 라이온, 기타등등 명작이 많은데, 하아, 어째서인지 도저히 제목들이 기억이 안난다. ㅠ
가끔 중고서점에서 김영숙을 검색하는데 내가 찾는 건 없고, 할리퀸적인 만화만 간간이 보인다.
잡지에서 연재하다 단행본으로 나오지 않은 경우에는 구하기 어려울 거고.
도시의 라이온은 희귀본이라고 중고서점에서 비싸게 샀던 걸 만화 박물관에 기증.
나도 팔려면 팔 수 있었으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갈채에 대해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다. 대학교에 들어간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친구 : 야, 갈채가 BL이었어!
나 : 머라?
친구 : 우린 걔가 여자라서 그러려니 했는데, 걔를 덮친(...) 애들은 다 걔를 남자로 알고 있었잖아.
아, 그렇구나.;;;
아마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8~90년대 만화책은 키스씬이나 베드씬이 꽃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역시 88년에 출간된 분노의 갈채에는 키스씬에 꽃이 없다. 어케 피했나?
김영숙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들의 공통점은 상당히 SM틱했다는 거다.
갈채에서도 샨 피에슬리라는 인물이 주인공을 조련;;하며 철저히 자기의 소유물로 만든다.
그리고 이게 매 시리즈 새로운 남캐로 대체된다. 샨은 계속 주인공의 뒤에 있지만...
갈채를 다시 보며 궁금해졌다. 김영숙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구상하고 그린 걸까?
복선이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이야기와 설정이 징검다리 뛰듯 확장된달지, 변형된다.
4부 분노의 갈채로 엔딩이 아니고 아마 하이센스에서 "미라클 플레이"라는 제목으로 5부를 연재했던 것 같은데
거기서는 주인공에 대해 '저 종족 중 아직 생존자가 있다니...'라는 대사가 나온다.
1부 갈채에서 주인공 쥬시카 에도니는 캔디형의 발랄하고 덤벙대는 배우 지망생이었다.
흐린 기억 속의 어머니도 배우였다.
어렵게 들어간 극단이 샨 피에슬리라는 재계의 숨겨진 손에 의해 망함.
샨은 쥬시카를 키운 선생은 살려줄 테니 자기의 소유가 되라고 함.
그래서 샨의 밑으로 들어간 쥬시카는 사라진 그리스 밀러라는 인물의 대역을 맡게 된다.
2부 마지막 갈채로 여기서부터 남장을 함. 그리스 밀러가 남자라서.
그리스는 사실 죽었음.
샨은 자기를 따랐던 그리스를 죽인 범인을 찾는 한 편으로 그리스 집안의 재산을 삼키려는 것.
그런데 그리스의 혼이 쥬시카에게 들어옴.
그래서 영혼을 공유하게 되고, 그리스는 쥬시카가 위험에 처한 경우 튀어나와 상대를 죽이는 방식으로 몸을 보호.
복수를 마친 쥬시카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다.
3부 영광의 갈채. 새로운 임무는 비밀리에 운영되는 연극집단 하리겐트 모건에 들어가라는 것.
냉혈한인 샨의 유일한 친구가 들어간 뒤 행방불명 되었다는 것. 남자만 받는 곳이라 여기서도 남자.
이번애 부여받은 이름은 유리 에스월드.
하리겐트 숨겨진 진짜 수장이자 배우인 바르샤도 크린스티는 샨과 유사한 인물.
즉, 유리를 괴롭히며 자기 것으로 종속시키려는 새디스트. 한 편으로 수 백 년을 살아온 비인간이라는 암시.
그러면서 전생인지 뭔지 하프를 연주하는 아름다운 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뭔가 쥬시카의 전생 같은 떡밥을 던짐.
하리겐트는 무너지나 바르샤도는 사라짐.
그런데 여기서 유리가 여자의 몸도 남자의 몸도 아니라는 설정이 추가(?)됨.
4부 분노의 갈채.
쥬시카가 사실은 마피아의 두목의 딸이었고, 마피아의 부인과 오른팔이 배신해서 죽였고, 마피아의 여동생이 야만 데리고 도망가서 딸로 키웠다, 는 이야기가 나옴. 이 사람이 가수이자 배우였음. 올, 1부랑 시나리오가 맞네?
복수하고 네 자리를 찾으라, 는 미션 발동.
일단 남장하고 하인으로 들어가 현재 마피아 두목의 부인이자 자기 어머니와 굳이 따지자면 의붓 아버지인 오른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쥬시카의 의붓동생)의 호위가 됨. 이번 이름은 리치.
거기서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마피아 두목이 또 야를 엄청 새디스틱하게 집적이고. ...
마피아 두목들의 두목이 차기 마피아가 될 후계자는 한 자리에 모은 뒤 새디스틱한 지시들을 내리고. ...
거기서 얼굴을 바꾸고 마피아 두목들의 두목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바르샤도 크린스티와 마주침.
그러니까 가학적인 명령은 다 바르샤도 크린스티가 쥬시카를 괴롭히기 위해 하는 것임.
미완결로 분노의 갈채 끝.
5부 미라클 플레이에서는 '저 종족 중 아직 생존자가 있다니...' 라는 대사 외에 기억이 1도 안남.
... 이십 몇 년 전이다;;;;;
만화 박물관에 하이센스가 있다면 볼 수 있을 지도. 근데 부록으로 따로 나왔던 것 같기도?
20대라 순정만화라는 게 있었다는 말만 들은 지인에게 넘기기로 했다.
잠깐 다른 이야기로 빠지자면 언젠가 이사하며 시그널 엑스가 통으로 사라져 이사업체에 물어보려다 말았었다.
필요보다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으면 흘리게 되는가보다, 하고 넘겼었다.
아직도 그 사태가 생각나면 가슴 아프지만... ㅠ
그래도 갈채는 읽고 싶다는 분에게 보내기라도 하지, 기증할 곳이라도 있지,
시그널 엑스는 전자책으로 나와서 다시 읽을 수라도 있지.
좋아하던 작가의, 오래 간직해온 종이책들은 그냥 버려야 한다.
너무 낡은 책은 기증해서는 안 된다. 예의가 아니다.
내게는 소중한 책이나 상대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버린 걸로 느껴질 터.
갈채는 만화책을 작별하기 시작하면서도, 꽤 오래 고민한 책인데,
하루하루 내 삶도 버려가며 살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시간, 나도 늙겠구나에 이어 나도 죽겠구나, 를 생각하게 되는 시기에 들어선 지금,
한정된, 그리하여 소중한 하루하루를 매일 버리고 있는데
이 책과 작별하지 못할 이유가 뭘까.
다 끌어안고 살 수는 없는 것. 그저 책장에 꽂힌 물건들 중 하나로 살아온 책인 걸.
작별할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언제 다시 들여다봤을지도 모르는 걸.
다 읽지 못한 책을 쌓아두고, 필요해서 새 책을 계속 사는 걸. ...
여담 하나. 30대 즈음 어느 날 ㅈㅅ이라는 중딩 친구가 말했다. "야, 우리 10년 전에 십대 아니야. 이십대야! 내가 중고딩 때 이야기하다 10년 전이라고 하니 언니가 20년 전이래!"
충격이었다. 10년은 엄청 긴 세월 아냐? 근데 10년 전이 십대가 아냐? 우리가 글케 나이가 들었어?
그런데 이제 10대가 30년 전으로 가고 있음. ...
그 무렵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며칠 전에 친구를 만났어. 얼마 안 된 친구야. 한 10년 됐나?"
아버지에게 10년은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하기사 학창시절 친구가 5~60년지기일 때니;;
남은 시간, 충실히 살아야 한다. 크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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