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려서부터 나는 책벌레였다.
국민학교 때 - 그렇다, 이 티스토리의 주인은 무려 국민학교를 나왔다 - 수업 종 땡 치면 교과서 꺼내고 -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는 건 아니다 - 종료 종 땡 치면 10분 쉬는 시간 동안 책 읽기를 반복했다. 점심 시간에도 밥 먹고 남은 시간에 책을 읽었다.
2. 내 돈으로 책을 살 수 있게 되면서 책은 점점 불어났다.
한때 원룸에서 산 적이 있는데, 벽을 모두 책장으로 채운 뒤, 방 한가운데에 침대를 놓고, 책장과 침대 사이의 여분 공간에도 키가 낮은 대신 길이가 긴 책장 두개를 서로 등을 대고 놓았다.
덕분에 집에서 게걸음으로 다녀야 했다.
책장을 새로 살 때마다 두 겹으로 꽂으려 폭이 깊은 책장을 사서 책들은 대부분 이중으로 꽂혀 있었고, 그 위에 누워있는 책들까지 책장이 빼곡했다.
책 한 권을 꺼내려면 여러 권의 책을 들어내야만 가능했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내 주변 사람들도 책이 많았다.
그러나 부동산에는 한계가 있는 법. 세월이 흐를 수록 쌓이기만 하는 책을 놓을 자리가 부족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인들이 하나 둘, 전자책으로 갈아타고, 아끼던 책은 종이책을 처분한 뒤 전자책으로 다시 사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절대 책을 정리하지 않을 줄 알았다. ...
결국 책과 작별하기 시작했을 때, 친구가 나에게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책 버려야 한다니까, 너는 절대 책 안 버릴 거라고 정색했어!"
... 미안했다, 친구야.;;;
3. 나도 한계가 오더라.
사놓고 안 읽은 책도 산더미였다.
향후 10년은 책 안 사도 읽을 거리가 이미 집에 있다.
하루에 책을 10권은 살 수 있어도 10권은 못 읽으니까. 품절되기 전에 사려고 일단 지르고 본 결과다. ㅋ
나이가 들며 집중력도 떨어져 읽는 속도도 느려졌고, 어릴 때보다 독서에 쏟을 시간 자체도 부족했다. ㅠ
좋아하는 작가들의 신작을 따라가지 못한지 10년은 된 것 같다.
다 읽은 책 중 떠내보낼 아해들은 떠나보내야 했다.
이미 집에 있는 책 중, 사놓고 못 읽은 책이 산더미인데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기는 어려우리라.
더 책을 놓을 자리가 없어서 책을 사기가 무서워진 것도 문제였다.
당장 꼭 필요한 책이 있는데, 이미 자리를 차지한 애들 때문에 망설여지는 것이다.
이건 아니지 않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책을 꼭 분야/작가 별로 정리한 곳에 꽂아둬야 한다. 안 그러면 못 찾는다;;
어떤 책을 당장 읽으려는 책을 꽂는 자리에 놨는데, 작은 책이라 다른 책 사이에 파묻히는 바람에,
그 책 찾느라 온 책장을 헤매며, 아, 나도 그날을 맞이해야 하나 보다, 싶어졌다.
이전 이사 때는, 택배 상자에서 나오지도 않은 책을 찾았다.
필요한 자료라서 산 책이었다. 참고로 그 작업은 이미 끝난 시점이었다.
떠나보낼 책들을 선정해야 한다는 압박이 찾아왔다.
다시 이사를 계획하게 되면서, 책들을 또 꽂을 생각에 막막해졌다.
견적 보러 온 이삿짐 센터 직원분들의 난감한 얼굴도 아른거렸다.
이사집센터 분들이, 순서는 못 맞춰도 같은 책장에는 꽂아주겠다고 하지만, 막상 짐을 풀다 보면 그렇게 안 되더라.
결국 다 빼고 다시 꽂아야 한다.
그걸 또 할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아득해졌다.
결정적인 계기는 나이였다.
나이가 커다란 중압감으로 나를 눌렀다.
내가 꼭 읽고 싶은 책도 다 읽지 못하고 떠나리라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에 들어선 것이다.
즉,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책의 절대 다수는 다시는 펼칠 일이 없으리라는 뜻이었다.
작년(21년)부터 결국 책들과 작별을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이게 뭐라고 이렇게 거창하게 구느냐 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4. 원칙을 정했다.
그냥 정리할 수는 없었다. 살 때마다 기뻐하고 이사할 때마다 힘겹게 다시 꽂으며 가지고 다닌 아해들이다.
일단 읽은 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미처 못 읽은 다른 책을 읽을 기회비용을 이 책에 다시 쓸 것인지,
즉, 정말로 다시 읽을 것인지에 대해서 물었고, 대부분 아니라는 대답이 나왔다.
사실 그래서 정말 정리하는 속도가 느리다. ... 정리 맞나;;;
5. 그렇게 책을 다시 읽으면서 몇 가지 사실을 깨닫고, 알게 되었다.
1) 모든 책을 다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내가 가지고 있던 책들, 몹시도 애정한 책들이나 다 불후의 명작은 아니었다.
작업에 필요한 자료, 정말 진짜 꼭 필히 다시 읽고픈 책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2) 작별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이 책들은 남은 세월 내내 장식으로 서 있었겠구나.
책을 사면 포스트잇으로 구입한 날짜, 장소, 읽은 날을 표기하는 버릇이 있다. 20년 동안 한 번도 다시 펼치지 않은 채 그저 꽂혀만 있던 책들이 부지기수였다.
작별을 결정했기에 다시 읽을 수 있었다. 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다시 읽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이란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인가 보다.
그래, 20년을 안 읽은 책이라면 정리하는 게 맞다. 20년 뒤 다시 읽고 싶어지면 그때 다시 사면 된다. 요즘은 온라인 헌책방이 잘 구현되어 있으니 말이다.
3) 종이책은 참 좋은 것이구나.
30년이 지나도 다시 읽을 수 있다. 전자책은 전자책을 읽을 하드웨어의 수명이 길지 않다. 심지어 제대로 재활용되지도 않고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다. ㅠ
4) 기증도 쉽지 않더라. 당근은 시간과 에너지 소모가 크다.;
그래서 만화책은 만화 박물관에 보내고, 책은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받지 않는 아해들은 울면서 보내기로 했다.
6. 간간이 독서 일기를 올리기로 했다.
어떤 책은 정말 좋은 책이었다. 작별하며 몹시도 마음이 아픈 책들,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픈 책들은 '독후감상문'을 쓰고 싶어졌다.
책은 좋아했지만, '독후감상문' 숙제는 싫어했는데. 까르르-
지난 달에 다녀온 여행기도 다 못 올린, 바쁜 데 게으른 인간이라 포스팅은 아주 느릴 것 같다.
흔히 한 블로그/티스토리에는 한 주제씩 하라는데 딱히 많은 이들이 찾아와주길 바라서 만든 곳이 아니다.
그냥 나 자신이 워낙 주절거리기를 좋아하고, 그래야 하는 인간이라 만든 곳일 뿐.
느린 업데이트에 주제별로 새로 만들면 다 유령되고 관리하기만 번잡스러울 터.
언제 올릴 지는 모르지만, 온라인/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올린다고 해서, 꼭 다른 사람을 의식할 필요는 없으니까, 천천히 나 자신의 느린 속도에 맞춰서 올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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