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1~4. 원수연 단편 모음집이다. 몇 달 전 알라딘 중고서점을 통해서 구입했다. 아마도 90년대 잡지를 통해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은 게 아닌가 싶다. 본 만화도, 보지 못한 만화도 있었다.
1~4권 다 2002년 출간작이다. 무려 20살 된 책임. 그에 견주면 책 상태는 아주 깨끗한 편이었다.
아마도 원수연을 좋아했던 분이 고심 끝에 내놓으셨거나 어딘가에서 고이 꽂혀만 있었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원수연은 의상디자인과를 졸업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사실 여부는 모른다. 감각적인 그림체가 어딘지 모르게 패션 디자이너의 드로잉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었다.
다시 보면서 90년대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응답하라 시리즈 중 응답하라 1988에 가장 공감한 세대다. *쿨럭*
PC통신 하이텔, 영퀴방(스무고개 식으로 영화 제목을 맞추는 영화퀴즈 방), 비슷한 만퀴-만화퀴즈-방, 만화창작동호회, 판타지 동호회 등에서 나는 TRPG, 보드게임 등 서브 컬쳐를 실컷 즐겼다. 물론 순정만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시판도 있었다. 보드게임은 나중에 보드게임 카페까지 생기며 붐이 열기도 했다.
원수연의 만화를 다시 보며, 당시에는 내가 그 속에 있었기에 인지하지 못했던 90년대의 정서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9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들이 지금은 '라떼는'을 입에 달고 사는 '꼰대' 취급을 받지만, 당시에는 '기성세대'와 다른 '자유'를 외치는 청춘들이었다. ... 갸갹;;
원수연의 만화를 보며 떠올린 90년대의 키워드는 자유연애, 여성의 흡연, 백수, 낭만, 이랄까. *쿨럭*
여기서 말하는 '자유연애'는 당장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연애, 부모님의 뜻과 상관없이 본인들이 좋아서 만나는 연애를 뜻한다. ... 무슨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내가 교복입던 시절, 여자 선생님이 말했다. "요즘 정말 달라졌어. 나 때는('카페 라떼' 라는 메뉴가 없던 시대일 걸?) 손 잡으면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어. 선 보고 만난 남자가 같이 걷다가 손목을 잡기에, 아, 이 남자에게 손목을 잡혔으니 나는 이제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 하는구나. 선생님 친구들 다 그렇게 결혼했어."
부모님이 주선한 선으로 만나 서로 영 싫지만 않으면 결혼하던 시대에서, 대학에서 직장에서 만나 사귀거나, 선보다 가벼운 지인 소개인 소개팅으로 만난 뒤 부모님에게 소개시키고 허락받아 결혼하는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두둥*
여자들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며 남녀가 섞여 공부하게 되자,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 가 화두에 오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 이 화두는 여전히 존재하지. ㅋ
원수연은 바로 이런 여러 가지, 변화하는 시기 90년대 감수성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단편들에 대한 리뷰를 다 쓰지는 않을 거고, 위에 쓴 이야기와 관련된 작품 위주로 감성을 적어보고자 한다.
근데 왜 전체 제목을 '바나나'라고 했을까. 참고로 '바나나'라는 제목의 단편은 없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1권에서는 세 번째 단편인 'Within you Without you'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단편은 오래 전 잡지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때는 이런 순식간에 열병처럼 빠지는 사랑, 연애의 과정이 순서(?)대로 진행되며 서로에 대해 신비감을 잃는 게 어떤 건지 몰랐다. ... 첫 연애도 해보기 전임. ㅋ
지금 보니 그 점을 포착한 것도 달리 보였고, 담배 피우는 여캐가 나온다는 것도 흥미롭다. 원수연 만화에서는 담배 피우는 여성 캐릭터들이 몇 번 나오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순정만화 여주가 담배를 피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순정만화에서만 드문 건 아니지만. 세상에 흡연자가 얼마나 많은데. ㅋ
암튼 이런 점에서 원수연은 당시 시대를 있는 그대로 포착해 그린 느낌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에서 담배 피우는 남자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담배 피우는 남자 멋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여자들도 공공연히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게 90년대부터인데, 이때는 여자가 지붕이 없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면 '풍기문란죄'(인지 경범죄)인지로 위법이었다. ... 진짜다;
당시 흡연자였던 여자 친구들이 길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제지를 받은 적은 없지만, 그래서 사실상 사문화된 법조항에 가까웠고, 결국 없어졌지만 한 때는 있었다.
어쨌든 여자가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못마땅하게 쏘아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담배를 피우러 카페에 가고는 했다. 음식점이며 식당이며 이때는 다 실내 흡연이 가능했다. *두둥*
또한 여자가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 마느냐가 논란이었다. 지금은 담배는 백해무익, 이지 남녀를 따지지 않지만, 저때는 진짜 그랬다. 학교 식당에서 담배 피우던 여자가 뺨을 맞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 이 이야기의 사실여부는 모름, 다만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해당 이야기를 연출한 적이 있다. - 그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대학교 교정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에 대해서, 같은 흡연자인 여자도 "나는 옥상이나 사람 안 보이는 데서 몰래 피우고 냄새 다 빠지게 한 다음에 나와. 저렇게 공공연히 피우는 건 아니지." 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건 90년대에 내가 실제 들은 이야기이다. 흡연자인 남자 선배가 흡연자인 여자 후배를, 역시 흡연자인 남자 후배에게 불러오게 한 다음에, 왜 여자가 교정에서 담배를 피우느냐, 고 나무는 일도 있었다. *이것도 실제 목격담*
이때 담배는 남녀평등의 화두였달까.;
그래서 오히려 "(여자가) 담배 피울 줄도 알아야지." 운운하는 남자가 편견이 없는 멋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더랬다. 더러 왜 여자만 못 피우게 하느냐는 오기로 피운 사람도 있었다. ... 담배는 백해무익합니다. 크앙-
이 만화에서 남주가 "(여자가) 담배 피울 때의 매너"를 운운하며, 1) 남자가 불을 붙여줄 때까지 기다릴 것 2) 코로 연기가 나오지 않게 조심할 것, 등을 나열하는 것도 이 남캐의 성향을 보여주는 거고, 담배를 서슴치 않고 피우는 여캐 또한 '당돌함' 이랄지, 사회의 편견에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랄지, 그런 여캐의 면모를 그리는 연출이 되는 것이다.
서로를 설레게 한 특별한 만남, 행복했던 연애가 저물어간다. 여주는 슬쩍 헤어짐에 대한 암시를 던지고, 남주는 느끼지 못한 것도 아니면서 모른 척한다. 헤어지기에는 아직 좋아하고, 계속 만나기에는 무언가가 사라져가는 시기.
결국 두 남녀는 각자의 길을 걸으며 마음 아픈 결별을 겪는다.
2권은 전체가 한 이야기인 장편이다. 제목은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
중산층에서 자란 여주는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지내며 요일별로 남자친구 일곱 명을 만나는 걸 목표로 삼는다.
다시 돌아봐도 대담한 발상이고 대담한 캐릭터다.
지금은 자발적으로 '백수'를 즐기기는 어려운 시대다. 하지만 지금보다 살기가 덜 빡빡했던 옛날에는, 중산층에서 부모님에게 얹혀 놀고먹는 백수들이 있었다.
여주는 바로 그 백수를 하며, 흔히 남캐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바람둥이'를 목표로 삼는다. 심지어 성공함.;;;;
하지만 얕은 감정으로 시작된 관계는 공허함만을 남길 뿐이다. 자책과 허무의 늪에서 여캐의 진짜 남친이 되는 사람은 요일별 남자가 아니었던, 심지어 보수적이라 피 터지는 논쟁을 했던 상대다. 백수를 벗어나서 취직도 한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교훈적이라는 건 아니다.
자유연애가 시작되던 시기, '여성스러움'의 굴레를 벗고 나아가려는 여성과 기존 모습에 머물러 있는 남성의 논쟁, 등등 당시 시대의 한 모습을 스케치했다고 봐야 한다.
첫 번째 단편은 '좋아하는 색 싫어하는 색'이다. 아마 요즘도 그러지 않을까 싶긴 한데; 비율과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는 정말 얌전하게, 미성년자에게 금지된 것에 딱히 눈 돌릴 기회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이 자랐다가, 졸업 후 혹은 대학교 때 갑작스레 밀어닥치는 성인 문화에 당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 환영회 때, 정말 거하게 술을 마셔야 했는데;;;; 그때 술집에 들어갔다는 사실 만으로도 눈이 왕밤만 해졌던 여자 학생 한 명이, 다음 날 학교 그만 둠.;;;;;; ... 술 때문이었는지는 물론 확실하지는 않음;;;;;
얌전한 학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주는 갑자기 성인의 세계에 진입한다. 다 같은 나이인데 자기만 촌스럽고(?), 다른 아이들은 전부터 일탈을 즐겨온 양 자연스럽다. 남주는 일탈의 세계에서 자라왔지만 그렇다고 그 일탈의 한계, 허무한 공허함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순진하던 여캐가 반항적인 남캐에게 끌리고, 반항적인 남캐는 순수한 여캐에게 끌리는 건, 어느 면 순정만화의 공식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두 캐릭터의 짧은 대화나 여러 모습들로 인해 전형적이기보다는 역시 한 단면을 잘 그린 단편이 아닌가 싶다.
두 번째 단편 '당신에겐 과분하게 멋진 남자'
내가 초딩... 흑, 아니 국딩 - 이 몸은 국민학교를 나옴 ㅠ - 때만 해도, 텔레비전이 없는 집들이 있었고, 초등, 아니 국민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 흑백 텔레비전에서 컬러 텔레비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꺄-
그래서 컬러 TV로 바꾼 집에서 안 쓰는 흑백 TV를 학교에 기증해달라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 *두둥*
텔레비전의 대중화는 대중 스타를 낳았다. 어른들은 초딩~고딩의 '오빠! 꺅!'에 걱정했다. 물론 남자아이들은 여자 스타에게 열광했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영화배우에게 '덕질'을 하는 딸로 인해 근심하는 아빠. '크면 이 배우랑 결혼할 거임.' 운운하는 '철딱서니 없는 딸'의 모습이 재미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같은 배우를 좋아했던 남자애와 결혼함. ㅋ
세 번째 단편인 '비로 오는 당신'은 처음 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펜화에 스크린톤으로 선을 입힌 굉장히 유니크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체였다.
아주 짧은 동화같은 이야기. 혼자 비를 맞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우산을 쓰면 비구름이 우산 아래로 들어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못 마심. 넘나 슬픔. 그리고 이런 유니크한 상상력!
십대 때 열광하며 읽은 순정만화 작가들의 아름다우면서 독특한 상상력들이 내게 영향을 미쳤음을, 오래도록 책장에 꽂아둔 채 놔두기만 했던 만화책들을 다시 꺼내 읽으며 실감했다. ... 이 책은 올해 산 거지만;; 최근 순정만화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의미;;
3권의 다섯 번째 단편인 '잃어버린 날'은 이 작품집에서 처음 읽은 작품이고, 원수연의 만화에서는 드물게 어두운 결말로 간다.
표지에서 두 주인공을 찍은 사진은 찢어져있고, 여러 심란한 기사 제목이 겹쳐지고 있다. 하지만 저 두 아이는 기사 속 사건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림으로 보아 총 4권의 단편집 수록작 중 비교적 초기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 만화를 보며 내가 순정만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또 하나 떠올랐다.
순정만화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어릴 때부터 독서소녀였던 나는 동화, 아동소설, 청소년 소설, 일반 소설, 판타지, SF 등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부모님도 책을 좋아해서 집에 책이 많기도 했다.
책을 읽다가 밥 먹으라며 누가 날 부르면, 이야기책 속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마주한 현실 세계가 일순 낯설게 느껴졌었다. 지금은 집중력이 그지가 되어서 이렇게까지 몰입이 잘 안 됨. ... 슬프다. ㅠ
하지만 이야기들은 이야기였을 뿐이다. 당시 아동/청소년 소설들은 대부분 공감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7~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90년대보다 가난한 사람이 훨씬 많았던 시절, 한 반에서 빈부 격차가 뚜렷이 나타나던 시절,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슬픈 이야기들. 당시 어렸던 내가 집중해서 읽을 수는 있었지만 공감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둘째, 다소 작위적이었다.;;
반 애들이 왜 남녀로 갈라져서 싸움? ...
그리고 막판에 왜 꼭 가장 치열하게 싸운 애들이 짝이 되어 다른 사람을 구함?
어린아이 독자를 넘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님? 억지스러운 건 다 안다고. ...
이거 나중에 드라마로도 되었는데 드라마에서는 남녀로 나누지는 않았다.
요는 문학적 완성도가 높았던 작품들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남의 이야기였고, 비교적 가벼운 아동/청소년 소설들은 대놓고 교훈적이거나 작위적이었다.
위인전들은 재밌었지만 역시 공감하며 읽을 책은 아니었고...
그런데 순정만화는, 딱, 지금, 그러니까 그때의 나, 10대의 내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는 작품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을 넘어서서 공감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줬달까...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엔 너무 아까워!
서태지와 아이들의 저 노래에 나는 얼마나 열광했던가. 교실에 앉아있으면 때로 숨이 막혔다. 하지만 뾰족한 일탈의 방법도, 용기도 없었다. 아주 얌전하게 학교만 다니진 않았지만, 선생님들의 눈에 띌 정도로 말썽을 부리지는 않는, 몹시도 애매한 10대를 보냈다. 그 귀한 10대를... 크흑-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여주. 자유롭게 화실에 드나들며 취미처럼 그림을 그리는 남주. 우리나라처럼 치열한 입시 교육 제도 하에서 입시를 벗어난 딴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탈이고 반항이다.
여주의 눈에는 어쩐지 어려우면서도 멋진 남주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무력한 미성년자다. 의대에 가야 하는 애가 왜 몰래 화실을 다니느냐며, 아이를 받은 학원 선생님에게 항의하는 부모. 일부러 받아 준 선생님에게 민망하고 창피하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아이.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의 손을 붙들고 무작정 도망친다. 집에 가면 혼나겠지만 그 시간을 늦추고자 하는 아주 소박한 일탈을 벌인다. 둘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는 일탈을 하려고 하나, 하필 10대 마약소지범을 찾던 경찰의 눈에 띄고, 외모가 닮는 바람에 오해를 받아 본격적으로 쫓기게 된다. 하지만 두 아이는 그걸 모른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좀 보려고 했다고 경찰까지 출두하니 당황할 밖에.
그래... 우리들의 모험이란 고작 금지된 문을 두드리는 것.
그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저 깊은 히말라야나, 우주에 떠도는 어느 혹성, 혹은 고대의 바벨탑에도 없는 것.
우리들의 세계는 우리들 인생에 관한 문제로 얽혀 있는 작은 사회.
비판과 신념을 갖고 더 큰 사회로 그 밖으로 나가보는 것.
그 무서운 시선 너머로 도망쳐 보는 것.
우리들의 모험은 작지만 아주 위험한 것. (바나나 3. p196~197.)
부모님에게 혼날 시간을 늦추려 잠시 도망치려던 아이들은, 택시기사에게까지 혼난다. 아이라는 이유로, 전혀 모르는 어른이 당연한 권리처럼 가하는 꼰대질.
뭔가 다른 하루를 갖는다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일까...
그냥 하루만 우리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싶은 것인데... (바나나 3 . p.198)
두 아이는 택시에서 내린다. 남자아이가 말한다. "어른이 좋은 이유는 주변에 어른이 없어서래."
이번에 둘은 디스코텍에 간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아는 얼굴을 보고 그만 움츠러든다.
남자아이가 말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여기는 하루만의 자유를 위해 우리에게 선택된 장소인데,
넌 결국 우리와 똑같은 친구들 때문에 스스로 얽매이잖아. 잘봐! 이곳에 우리 또래 애들이 더 많아. (바나나 3 . p.201)
이렇게 말하지만 남자아이의 마음도 마냥 편하지는 않다. 지금 일탈의 의미를 스스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남자아이는 말한다. "나는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야. 이런 현상들에 대해, 모두들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것에 대해..."
2020년 기준으로 매일 2.6명의 청소년이 자살했다. 비단 청소년만 그러할까. 우리나라는 OECD 국가중 자살률이 1위이다.
여전히 이 아이들을 마약사범으로 오해한 경찰은 집요하게 아이들을 따라잡고, 아이들은 옥상에 고립된다. 아이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자기들은 오늘 약간의 일탈을 하려 했을 뿐인데, 왜 경찰들까지 몰려 와 몰아치는가.
이는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압박, 작은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는 숨막히는 세상에 대한 은유이다.
미대 이야기 또 꺼내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엄마, 새아빠가 무서워 집에 가기 싫은 아이, 단 하루도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세상이 아이들을 포위한다. 4권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연출이었다.
남자아이에게 이 포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오빠는 그렇게 갔습니다. (중략) 패배하기엔 너무도 많은 내일을 남겨놓고...(중략)
젊음은 달콤하고 낭만적이며 안이한 것이 아니라, 전 인생을 통해 가장 위험한 고빗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충격은 일생 지워지지 않겠지만 전 패배하기엔 너무도 많은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
말 없는 다수의 희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잃어버린 날, 마지막 쪽 독백)
돌이켜보건데 나는 참으로 운 좋은 청소년기를 보냈다. 마이너한 성향이 있던 내가 PC통신을 통해 많은 문화를 접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고, 학교에서도 폭력적인 일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바 없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소설과 영화, 양쪽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나 아이들은 여전히 성적으로 고통받고 있고, 학교 폭력의 수위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뭐라고 말을 맺어야 할지 모르겠다.
세 번째 단편 '유행토픽'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온갖 유행에 영혼을 바치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툭 던지는 "이 세계는 그런 세계야." 류를 몹시 좋아하고, 역시 내가 영향을 받은 부분이다.
유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패션이다. 손으로 실을 잣고, 자은 실로 천을 만들고,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야 옷 한 벌이 나오던 길고 긴 시기를 지나 공산품의 시대가 열렸다. 옷 한 벌 짓는 데만 한 세월 걸리던 때는 옷이란 몹시 귀한 것이었다. 과거에도 유행은 있었지만 옷을 만들기 어려운 만큼 지금처럼 유행이 빠르게 돌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사고, 그러느니 만큼 쉽게 버릴 수 있게 되며 유행하는 스타일도 삽시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남들 따라가는 패션 운운과 자기 개성 운운이 나오기 시작했달까. 특히 90년대는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스타들을 따라하는 유행과 자기만의 개성 운운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여기서는 옷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 연애의 방식, 줄 서는 곳, 출퇴근 시간*쿨럭*까지 유행이 휩쓸기 시작했다. 이때는 그냥 재미난 발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면 꽤 들어맞지 않는가!
이런 세계에서 유행에 둔감한 여자와 유행을 싫어하는 남자의 만남을 다룬 재미난 단편.
네 번째 단편. 비를 본적이 있나요.
평범한 성격의 여주가 동경하던 선배(남주)에게 고백을 받는다. 어쩐지 이 선배 앞에만 서면 말이 안 나오고, 어울리지도 않게 내숭을 떨게 되어 본인도 당황스럽다. 스마트폰은커녕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늦는 상대를 무작정 기다리거나 그냥 가야했던 시절, 15분을 늦은 여주는 남주가 기다리다 갔는지, 늦는 건지, 잠깐 자리를 비운 건지 알 도리가 없다.
저때는 "늦는 사람을 몇 분까지 기다릴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이 있었다. 언제 오는지 알 방법도 없이, 일방적으로 기다려야 했으니까.
개인 전화가 없이 집 전화를 쓰느라 가족들 눈치도 봐야 했고. ㅋ
이 전에 책 정리하는 글을 쓰며 썼던 이야기지만, 작별하기로 결심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책장에 꽂혀 있었을 책들을 다시 꺼내 읽으며 행복했다.
바나나 1~4권은 지금 20대를 보내고 있는, 순정만화를 모르지만 알고 싶다고 한 지인에게 보내려고 한다.
내 책장에만 꽂혀서 세월을 보내면 아깝잖아. 좋은 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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