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2월 초에 ㄴㄹ가 카톡을 보냈다.
ㄴㄹ : 구례 가자! 완전 예쁠 것 같음.
ㄴㄹ가 보낸 구례 풍경 사진은 어째서인지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15일에 마감을 마친 뒤 여행을 가고 싶었다.
춥다, 여행 가고 싶다, 사이에서 고뇌하던 내게 동행이 생긴다는 건 추진력이 달린다는 것.
나 : 가즈아! 15일에 마감 마치고 16일 가능.
ㄴㄹ가 18일에 월차를 써서 16~18일, 2박 3일 구례행 결정!
그런데 이번 마감, 정말 힘들었다.
보통 나는, 15일이 마감이면 1일에 초안을 마치고 남은 시간 동안 검토한다.
10일이 지나도록 초안이 끝나지 않았다. *두둥*
심져 13일에 건강 검진 + 대장 내시경이 예약되어 있었다. 막판에 하는 지라 미루지도 못한다. 이 날짜도 겨우 잡음. ㅠ
대장 내시경은 사흘 전부터 흰죽, 달걀, 두부, 카스테라만 먹어야 한다;;
나물, 버섯, 수박이나 딸기처럼 씨있는 과일 금지. 금지 목록이 길어서 흰죽/달걀/두부/카스테라만 가능하다는 걸로 기억하다는 게 좋음.
전날에는 커피도 금지! 장에 착색된다고.
그리고 대장 비우는 약 먹어고 계속 화장실 들락날락해야 하고. ㅠ
이 개고생을 하는데 식단 못 지켜서 망할 수는 없잖아?
아아, 커피 금지라니, 커피 금지라니, 마감이 코앞인데!
오전 6시 반 검진 예약이 잡혔는데, 3시 반에도 약 먹고 장 비워야 한다. ㅠ
마침내 대망의 13일. 2~3시간 눈 붙이는 둥 마는 둥 하고 병원에 감.
돌아와 한숨 자고 다시 원고 달림. 초안 완성!
이번 원고는 진짜 마감이 해냄. 마감을 맞춰야 한다는 일념으로 달림.
물론 "대단히 송구하오나 조금만 더 시간을... ㅠㅠ" 하고 양해를 구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 뒤에도 줄줄이 마감이 있다고!
여기서 밀리면 도미노 현상 일어남!
결과물이 나와야 잔금을 받는 직업이라, 마감 늦추면 돈도 늦게 들어온다는 의미. ...
이틀, 검토를 마치고 여행을 갈 수 있을 것인가?!
... 어찌 어찌 해냄. ㅠㅠ
그리하여 이 잠순이가 3시간인가 겨우 자고 일어나서 구례로 출동!
2. 구례다!
전날 제대로 자지 못한 여파로 버스에서 기절할 수 있었다. 와하하하하하
한숨 자고 나니 구례였다. 이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는데 다행히 눈이었다.
직장인인 ㄴㄹ도 눈을 보고 신나했다.
출퇴근길에 눈 내리면 스트레스지만 여행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보니 좋았다.
심지어 나는 집콕 인생이라 눈을 맞으며 기분 좋게 걸은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한다는 일념하에 식재료는 엔간하믄 집 근처 마트로 걸어가서 사오는데,
눈 오면 싫었다.
그런데 이날은 너무 좋았다. 눈이 오면 마냥 신나던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3. 동아식당 가오리찜
피차 바빴던 터라 버스 타고 가면서 식당 검색. 나는 네이버 지도에서 음식점, 을 누른 뒤 하나하나 클릭하며 메뉴를 확인해서 끌리는 식당에 가는 편이다. 동아식당은 허영만이 다녀간 곳으로 유명하다고.
메뉴는 가오리찜과 돼지족탕, 두 가지인데 우린 가오리찜을 택했다.
나는 처음이었고, ㄴㄹ는 전주에서 먹어봤는데 맛있었다고. 둘이 여행오니 좋고나. 혼자면 밥집 잘 못 들어감. 지방은 1인분 시키기 어렵기도 하고, 음식이 너무 남아서 내가 아까움. ㅠ
ㄴㄹ, ㅈㅁ과 먹다 보니 내가 양이 작긴 하더라. 아부지랑 먹을 때는 아부지가 나보다 조금 드셔서;;;;
최선을 다했는데 밥 남겼다고 구박 받음. ㅠㅠ
담백하니 맛있었다. 반찬들도 좋았다. 신나!
3. 이번 여행 스케치북
테리 프래챗의 순수 고양이 사은품으로 왔던 수첩이다. 무려 2007년부터 책장 어딘가에 박혀 있던 아해. 좋아, 너, 써주마.
페이지가 완전히 펼쳐지지 않는 게 좀 불편하지만, 뭐, 그쯤이야.
4. 호텔 예일스테이
밥을 먹고 숙소로 가는데 너무너무너무 추웠다. 집콕으로 사느라 겨울 추위의 무서움을 몰랐다. ㅠ
다이소에서 기모스타킹을 사고, 숙소에 가서 갈아입을 일이 있을까 해서 가져온 상의를 추가로 입었다.
대장 내시경 덕에 강제 다이어트를 하느라 살이 좀 빠진 덕에 상의 두 벌 입고도 패딩 입는데 무리가 없었다. 크앙-
구례 숙소는 대부분 오래되어, 네이버 검색에서 보니 벽지들이 꽃무늬;;였다. 현대적(?)인 곳은 뚜벅이인 우리가 가기에는 멀었다. 가까운 곳이 짱이다, 하고 개중 괜찮아 보이는 예일스테이로 감.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했는지, 네이버에서 보인 사진과 달리 꽃무늬 벽지가 아니었다.
굉장히 독특한 인테리어를 쓴 곳으로 소소한 소품 하나하나가 다 재밌었다.
처음에 방에서 이 대나무 벽지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영화 속 장면 같은 복도나, 방에 있던 카운터 연결용 전화기나, 전등, 계단 복도에 걸려있던 그림 등등 재미난 감각이 보이는 곳이었다.
5. 섬진강을 따라 산책하기로 했다.
와- 기모 스타킹 안 샀으면 어쨌을 뻔?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우린 어린아이처럼 신났다. 바람도 불어서 우산은 별 의미가 없었다.
눈이다! 함박눈이다!
내리자마자 녹아서 걷기는 힘들지 않았다. 눈 보고 좋아하는 거, 나이 들면 힘든 일이라고. ㅋㅋ
패딩 소매에 묻은 눈을 혹시나 하고 살피니, 어머, 세상에! ㄴㄹ야, ㄴㄹ야, 이거 봐!
신나게 부름. 딱 눈 결정 모양이 보인 것. 우와아아아아아-
40대 중반 아낙 둘이 사진으로만 보던 눈결정 직접 봤다고 좋다고 꺅꺅 거림. ...
어릴 때도 본 기억이 난다. 눈 맞으며 혹시 그 결정이 있지 않을까 했던 것.
아직 내 시력이 그 작은 눈 결정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이번에 하동은 가지 않았지만 구례와 하동은 가깝다. 하동은 중고딩 때 한 번, 작년에 한 번, 두 번 읽은 태백산맥의 주무대다. 섬진강도 종종 배경으로 등장한다. 직후에 '남부군'을 읽으며, 태백산맥에 대해서 당황스러운 사실을 알고 상심했지만;;; 그런 일이 없었다면 섬진강! 태백산맥! 하며 열광했을 텐데...
멀리 보이는 산은 오산, 태백산맥을 이루는 산 중 하나다.
산이 어쩌면 저렇게 영험한 기운을 주는지. 산신령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실감한 순간이었다.
구례, 멋진 곳이었어! 사진 하나로 판단하면 안 되었던 것이다!
강 옆에서 걸으면 좋았을 텐데, 한 번 내려가는 길을 놓치고 나니 길이 없었다. 에헤라디야, 걷자꾸나!
메타세쿼이아도 열매가 열린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신기. ㄴㄹ는 메타세쿼이아가 겨울에도 푸른 나무인 줄 알았다고 했다. 역시 자연은 직접 봐야 해.
마침내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거기서부터 더 앞으로 전진은 불가. 슬슬 숙소로 귀가해야 할 때가 와 이번에는 섬진강에 더 가까이 붙어서 걸었다.
겨울에는 노는 논을 파크골프장으로 쓰고 있었다. 어르신들에게 좋은 운동이라고. ... 곧 내게도 좋은 운동이 되겠지. *쿨럭*
나무에 검은 왜가리?? 그런 새 두 마리가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 : ㄴㄹ야! 저기 새 있어!
ㄴㄹ : 어디어디어디?
나 : 저기, 저거 안 보여?
이럴 수가, 검은 비닐 봉지였다. 진짜 둘 다 빵 터짐.
ㄴㄹ : 야!!! 새가 어딨나 했잖아. 네가 가리키는 데는 봉지 밖에 안 보이고.
둘 다 배를 잡고 웃었다. ㄴㄹ와 여행을 가면 웃을 일이 많이 생긴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자갈만 굴러도 웃는다는 사춘기 소녀 마냥 웃음보가 터지는 것이다.
얼마 전에 맞춘 변색렌즈 선글라스를 끼고 갔었다. 일반 안경은 안 가지고 감. 그런데 이 흐린 날에도 렌즈 색이 변하는 것이다.
ㄴㄹ : 야, 네 안경 어쩔 거야! 그러니까 봉지를 보고 새라 그러지!
나 : 이거 밖에 안 가져온 걸 어떡해. 와, 진짜 벌써 어둑해졌나 했네.
흐린 날 선글라스 낀 게 뭐가 그리 재밌다고, 2박 3일 내내 내 변색렌즈 선글라스는 우리에게 수시로 웃음을 선사했다.
그리고 걷다가 ㄴㄹ 미끄러지며 순간 나 살짝 잡음. 동시에 나도 미끄러짐. 땅이 미끄러웠음. 그게 또 웃겨서 깔깔 대고 웃어댔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었다. 밭? 부근에 작은 프로펠러가 달린 기둥들이 서 있었다.
ㄴㄹ : 풍향계임. 저렇게 작은 프로펠러로 전기 공급이 될 리 없음.
나 : 풍력 발전임. 풍향계는 저렇게 많을 필요가 없음.
풍향계가 절케 많이 서 있다고? 돌아가며 자세히 보니 전깃줄 같은 게 보였다.
나 : (의기양양) 풍력발전 맞지? 여기가 섬진강 유역이라 바람이 겁내 많이 부니께 풍향계 단 거.
ㄴㄹ : 어, 그런가 보네? 밭은 감당할 수준이 되나 보네.
나 : 음하하 (허리손) <- 비닐봉지를 새라고 우겼던 인간. ...
섬진강을 따라 걷는 건 칼바람 때문에 너무너무너무 추웠다. 우린 다시 문명(?)으로 돌아갔다.
숙소를 나와 걷는 동안 사람을 거의 못봤다. ㄴㄹ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혼자 걸었으면 무서웠을 것 같았다.
밥을 먹기에는 배가 안 꺼지고, 그냥 들어가기는 섭섭하던 차 발견한 모니카 베이커리. 어제 만든 빵은 20퍼 할인. 나는 1개. ㄴㄹ는 2개를 골랐다. 사진을 보니 테이블이 있었네? 그런데 어째서인지 여기서 커피를 마시지 않고;;; 빽다방으로 가서 잠시 언 몸을 녹였다. 이때가 6~7시 경. 숙소로 돌아가기에는 좀 아쉬운 시각이었다.
ㄴㄹ : 나 지방 영화관 가는 거 좋아해서 여행 가면 일부러 영화 봐.
나 : 난 안 해 봤어. 영화 볼까?
ㄴㄹ : 서울의 봄 봤어?
나 : 안 봄.
ㄴㄹ : 그거 볼까?
나 : 콜이지!
구례에는 CGV가 없었다. 자연드림시네마라는 지역 영화관이 있었다. 오오, 궁금한데? 가즈아!
문제는 차편이었다. 마을버스는 텀이 너무 길어서 영화 시간에 맞춰서 못 가겠고, 택시를 타면 15000원인 거샤. 왕복 3만원. ㅋㅋㅋㅋㅋ
ㄴㄹ : 그래도 갈까?
나 : 그르즈아! 놀러와서 아낄 거 있나. 가즈아!
자연드림은 일종의 건강식품 판매소 같았다.
영화가 광고 없이 바로 시작했다. 광고가 극장에 붙는 거라는 걸 이날 알았다.
으음... 영화는... 나는 역사적 해석없이, 관객이 아는 사실에 기초해, 그냥 캐릭터 싸움으로 밀고 간 느낌이라 별로였으나 세 번째 보는 ㄴㄹ의 평은 나와 달랐다. 사람이 다 같으면 재미 없지.
버스는 끊겼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 안에서 택시를 불렀다. 사각 유리를 쳐두어서 안에서 기다려야 했다. ... 영화관에서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다. ㅋㅋㅋㅋ
버스 정류장 안에 충전 케이블이 있었다. 역시 대한민국. ㅋㅋ
이번 여행은 구례에서 그린 그림 이상으로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싶은 그림이 넘나 많아서 ㅠ 수원 여행 그림 그리느라 못그린 그림들 그려야 함. ㅠ
한동안 못 그린 그림 그리고 수원과 구례 그림 더 그릴 수 있을지 두고 봅시다. 크아앙- (2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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