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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2022 지보이스 정기공연 <그래도레미>

by 운가연 2022. 10. 23.

 

지보이스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소모임으로 탄생한 아마추어 게이코러스 합창단이다.

지보이스 공연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어떤 공연일지 두근두근하면서 갔다.

여러 번 지보이스 공연을 관람한 지인은, 코로나 전에는 다른 단체와도 합동 공연을 해서 엄청 화려하고 볼거리도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모여서 연습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번에는 지보이스 단독 공연이었다.

그나마도 지난 2년은 코로나 때문에 열지 못했다고 했다.

 

공연전에 사전에 녹음한 대화 형식, 나레이션으로 그간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연습이 어려워져서, 줌으로 하려다가 다들 뒷목잡았다거나 ㅋㅋ

줌은 딜레이가 있어서 합창 연습하기엔;;; ㅋㅋ

 

여러 일로 떠난 단원들이 많았는데 이번 공연을 하려고 다시 불렀다거나,

이런저런 일로 사이가 틀어진 사람들이 있고, 완전히 화해가 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해서

2년 만에 만났지만 다들 아주 반갑지는 않았다고.

어떤 커뮤니티든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솔직하고 유머러스하게 인정하는 부분이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동시에 유쾌했다.

 

공연 사이에도 공연 준비 과정, 친구사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사전에 녹음한 대화 형식으로 들려줬는데

"탑은 없고 수요없는 바텀만 다글다글하다."라는 하소연에 또 빵 터졌다.

 

공연은 어쩌다 한 번 보러 가기는 하지만;;;

그 부족한 경험 속에서 공연장에 남성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은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마추어라서 아주 프로 수준은 아니었다. 중간에 녹음된 대화로 "관객 여러분 우리 노래 듣느라 수고 많으십니다."

에서 또 한바탕 웃었다.

 

노래 중 아마 우크라이나 민요였던 '슈체드리크' 라는 곡을 가장 잘 불렀다.

영어도 아닌;; 정말 낯선 언어의 가사라, 가사를 외우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들었을 거다.

그만큼 많이 연습한 곡이고,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니 가장 근사하게 나온 것 같다.

 

역시 녹음된 대화로 이걸 어떻게 외우냐, 영어가 많다는 불평에 공감하며 웃었다. 나도 영알못이다.;;

 

그래도레미 공연에서 제일 좋았던 건 관객들이 수시로 함성을 지르고 웃고 호응을 했다는 거다.

와- 진짜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전에도 소극장에서 하는 한 가수의 단독 콘서트에 간 적이 있다.

가수가 박수도 많이 쳐주시고 호응해달라고 했는데도, 다들 옷자락 스치는 소리 하나라도 날까 긴장모드였고,

헛기침도 노래 끝나고 박수 터질 때 살살했다.

작은 소음이라도 내서 민폐끼치게 될까 신경 쓰여서 오히려 음악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공연에서 가급적 조용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옷자락 부시럭 거리거나 가방에서 뭐 꺼내느라 움직거리면 다른 사람에게 방해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요구하는 조심성의 정도가 지나치게 과해진 것 같다.

노래 중간에 호응이나 박수가 완전히 금지되었달까. 특히 소극장 공연이 그런 것 같다.

그래도레미 공연은 그런 제약이 없었다.

노래를 부를 때에도 다들 열렬히 응원하고, 재미난 춤을 추면 신나게 웃고, 흥겨운 노래는 박수치고,

단원들과 개인적으로 아는 관객은 장난섞인 야유를 던지기도 했다.

간만에 정말 편하게 공연을 봤달까, 더 몰입하며 볼 수 있었달까.

 

백조의 호수도 기억에 남는다.

남자들이 우아한 발레 포즈를 잡으며 익살스러운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데 오글오글 꺅- 하며 관객들 모두 즐거워했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 화면에 글자가 쓰여지며, 앙코르를 해달라는 말이 떴다.

당연히 큰소리로 "앵콜! 앵콜!"을 외쳤다.

그때 키가 작고 마른 분이 나와서 분장실에 자리가 없다고 쫓겨났다며, 무대에 앉아 주섬주섬 차림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소매를 어떻게 하니 레이스가 슉 나오고, 삽시간에 옷이 바뀌는 모습이 신기했다.

의상이 바뀌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는데도, 신비가 깨지는 게 아니라 마술쇼를 보듯 근사했다.

하이라이트는 바지 밑에서 형광 연두 양말이 나온 뒤, 챙겨 온 종이가방에서 형광 연두 하이힐을 꺼냈을 때였다.

 

앙코르가 진짜였어!

형광 분홍, 형광 오렌지, 형광 빨강 구두를 신은 단원들이 나와서 한바탕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했다.

 

반주는 피아노 하나, 간혹 단원 하나가 북같은 가벼운 악기를 얹는 정도였는데도 공연이 꽉 차 있었다.

 

마지막 노래가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 였던 것 같다.

와, 진짜 멋진 가사였다.

누가 누구와 사랑을 하든,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남일이고 남의 개인사다.

왜 이러쿵 저러쿵 하나.

남의 개인사에 불편한 관심을 보이고, 그걸로 차별을 하니 차별금지법이 필요하잖아.

다른 사람 사생활에 상관 안하면 그만 아닌가.

사람의 죄는 사후 세계에서 심판한다는 설이라도 있지.

세상이 범한 죄는 누가 벌하나. 누가 용서해주나.

가슴 아픈 동시에 주체를 바꾸며 인식을 달리하게 해주었다.

 

 

 

내년에도 하면 좋겠다. 또 가야지. ^^ (22.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