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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아버지와 공주, 봄] #1. 아부지, 여기 우렁무침 있어여.

by 운가연 2024. 8. 30.

1. 아버지가 눈물을 보였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아버지와 밥을 먹는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평생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봤는데, 그중 2~3회가 근래 들어서였다. 얼마 전에는 할머니를 모시고 일본, 자신이 잉태된 곳에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해 한스러워하며 눈물을 지었다.

병아리 모이 주듯 매달 생활비만 보냈을 뿐 실제로 부모님에게 무언가를 해 준 적이 없다는 짙은 회한이었다.

나랑 같이 가자고 했지만 이제 와서 가면 마음만 더 아플 거라고 거부했다.

 

나 : 아부지, 그럼 딸이랑 국내여행 가요. 예쁜 곳 많음.

 

아버지에게 여행 가자고 한 건 나중에 울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내 커다란 기둥이었던 아버지가 늙고 약해지는 모습이 때로 두렵다. 누구나 그러하듯 아버지의 생도 언젠가 마지막 날이 올 것이다. 그 사실 자체도, 내가 겪을 상실도 두렵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하기로. 가즈아, 공주!

 

2. 공주로 정한 건 한 번 가 본 곳이고 관광지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6년이 지났다. 근 11년 만에 혼자 여행을 간 것도, 내 어여쁜들을 보낸 시간도...

그칠 것 같지 않던 눈물이 그쳤다. 가끔 페이스북에 몇 년 전 오늘이라며 넘들 사진이 떠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거나 눈물을 쏟지 않는다. 잘해주지 못한 후회만 여운처럼 남아 있다.

 

3.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우등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아버지와 나 둘 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 1시 버스를 예약하고 고속터미널에 갔다. 고속버스터미널 겁내 좋아졌네? 대기실 의자도 고급지고. 

12시가 좀 넘어 아버지에게 전화하니  걱정 말라고 함. 드로잉을 하며 느긋하게 기다림. 12시 40분이 넘으며 초조해졌지만 아까 통화해서 안심하다가;; 어느새 50분. 다급히 전화.

 

아부지 : (느긋하게) 화장실 들렀다 갈게.

나 : 아부지, 10분 뒤에 버스 출발임!

아부지 : 2시 라메?

나 : 1시!!!!

 

다급히 우리가 타야 할 버스로 감.

 

나 : 아부지가 5분 안에 오실 텐데여. ㅠㅠ

기사 : 정시에 출발;;

나 : ... 그져? ㅠㅠ

 

다급히 대기실로 감. 아부지 오고 있음. 아부지 손 잡고 감. 출발 3분 전에 버스 탑승 성공. 크앙-

 

이게 어찌된 일인고 하니, 1시로 할까, 2시로 할까 하다가 1시로 낙찰했는데 아부지가 헛갈린 것.

 

아부지 : 나 12시에 벌써 와 있었어. 일찍 오길 잘했네.

나 : 허어얼;;;;;;;;

 

2시로 생각하고 어째서 12시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천만 다행이었다;;;;

 

4. 점심. 토속식당.

 

공주에 도착.

아버지와 나 둘 다 여행짐이 가볍다. 그래도 나는 잠옷은 챙겨왔는데 아부지는 속옷 입고 자는 지라 늘 가지고 다니는 크로스백 하나가 전부. 그래서 딱히 숙소에 들러 짐 내려놓고 할 것도 없어서 점심부터 먹기로.

 

점심은 토속식당에서 우렁쌈밥을 먹었다.

 

 

여기서 일화 하나.

 

쌈장에 버무려진 우렁 세 개를 본 아버지의 표정이 책 읽듯 읽어짐.

 

아부지 : (우렁쌈밥 정식이라더니 우렁은 고작 세 개야? 엥이...)
나 : 아버지, 여기 우렁무침 있어요.
아버지 : (엥이, 반찬이나 먹어볼까.)
나 : 아버지, 여기 우렁무침 있어요.
아버지 : (엥이, 어떤 반찬이 개중 먹을만 하려나.)

한 번 더 한 후 포기. 이후 아버지가 마뜩찮은 얼굴로 다시 반찬을 살필 때 다급히 우렁무침을 내밈.

나 : 아버지, 여기 우렁무침 있어요.
아버지 : (놀란 얼굴) 오, 우렁무침이 있었어?
나 : 쫌 전에 세 번 말해써여.
아버지 :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지, 한 다섯 번 말했겠지.

빵 터진 나. ㅋㅋ

나 : 아버지, 된장찌개에도 우렁 들어가 있어요.

이것도 한 세 번쯤 말함. ㅋㅋㅋ

그런데 아부지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직도 모름. ㅋㅋㅋ

 

오늘 할 일이 많아서 일단 밥 먹은 데까지만 기록. (24.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