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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아버지와 공주, 봄] #4. 다음 생에도 우리 아빠가 되어 주세요.

by 운가연 2024. 9. 6.

0. 다음 생에도 내 아빠가 되어주세요.

 

아버지가 늙어감을, 삶의 황혼기에 들었음을 인지한 어느 날, 나는 아버지가 다음 생에도 내 아버지이길, 그때는 빨리 철 들어 아버지와 일찍 친해지길,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바랐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어쩌면 나는 지난 생에도 같은 소원을 빌었을지도 모른다고, 이번이 내게 온 두 번째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자주 전화하고, 한 달에 한 번은 만나 밥을 먹지만,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 것도 아버지와 함께 있는 순간의 소중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번 생에서 받은 두 번째 기회일 지도 모르니까.

 

1. 일어나서 어제 남겨온 밤떡명가 2개를 아버지와 사이좋게 하나씩 먹었다.

 

담백하니 맛있더라.

 

2. 흥미진진 마곡커피 2호 산성점

 

아버지에게 커피와 빵으로 간단한 아침 어떠한지 물으니 아버지도 흔쾌히 좋다 하심.

숙소 바로 앞에 있던 흥미진진 마곡커피에 갔다.

 

지난 공주 여행 때도 충동적으로 들어갔던 곳이었다. 사장님에게 전에 와본적 있다고 하니, 그때가 오픈한 해였다고.

 

어르신들이 하는 카페인데 커피와 빵 둘 다 맛있었다. 커피잔에 대한불교 조계종 공주시니어클럽 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르신들 지원 카페였던 걸로 기억한다.

 

흥미진진 마곡

 

3. 카페를 나와 무령왕릉으로.

 

 

아버지는 무령왕릉을 재미없어했는데, 작은 동산 같은 무덤들이 비슷한 형태로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 무령왕릉이 의외로 발굴된지 얼마 안 됨. 아버지가 말해줘서 알게 되었고, 표지판을 보며 아버지가 궁금해하는 것들 설명함.

 

박물관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된 시기, 발굴 작업, 당시 무덤 형태 등등에 대해서 여러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 저런 문양이 있었다.

 

아버지 : 저건 뭐냐?

 

나 : 저것은 진묘수(眞墓獸)이옵니다. 무덤을 지키는 상상 속의 동물로,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한 사례라고 하옵니다.

 

아까 박물관에서 얼핏 설명을 본 기억이 났다. 설명판을 사진으로 찍어뒀던 터라 찾아서 읽어드림.

 

 

아버지 : 쟤는 원래 일찍 색이 변하는 단풍나무야.

나 : 헤에에?

아버지 : 혼자 먼저 일찍 색이 변했다고들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종이 달라.

 

시골에서 자란 아버지는 자라며 자연스레 알게 된 자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 나는 가끔 여름에 온통 빨간 단풍나무 볼 때마다, 쟈는 어쩌다 빨리 색이 변했누, 했는데. 껄껄-

 

 

바닥에 완전히 다듬지 않은 돌을 깔아둔 이 길은 예쁘다. 하지만 걸음이 불편한 아버지에게는 너무나도 불편했다. 이번 여행 때 새삼 우리나라 길들이 건강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만들었음을 느꼈다.

 

사람은 아이로 태어나 노인이 되는 게 순리다. 그런데 아이, 청년, 장년, 노인이 어느 순간부터 완전 별개의 존재인 양,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고 그 시점으로 고정된 사람처럼 대해지는 모습을 본다. 환경 단체의 광고에서도 중장년 이상을 자연 마구 써서 뒷 세대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그린 걸 보고 충격받았다.

글쎄, 중장년이 자연재화를 오직 자기만을 위해 쓰나? 그거 애들 키우는 데도 쓴다.

그 이전에 이게 맞나? 이런 식의 가름이 옳은가?

 

무덤들 중 무령왕릉까지는 확인하지 않/못하고 내려왔다.

 

무령왕릉을 나와서 본 거리 풍경

3. 희망식당에서 백반을 먹었다.

 

4. 딸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

 

잠깐 카페에 가서 쉬기로 했다. 네이버 지도로 가까운 데 있는 카페를 찾음.

 

아버지 : 카페가 어디라고?

나 : 왼쪽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됩니다.

 

그렇게 가다가 길을 건너서 보니, 오른쪽으로 가서 왼쪽으로 꺾는 게 좀 더 가까웠다. 횡단보도 위치가 예상과 달랐달까.

내가 오른쪽으로 꺽자...

 

아버지 : 왼쪽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걲는다더니 왜 오른쪽으로 가?

나 : 아버지 직육면체가 있어여. 오른쪽으로 가서 왼쪽으로 꺾으나, 왼쪽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나 같은데, 현재 위치 상 오른으로 가서 왼쪽으로 꺾는게 조금 덜 걸어여.

 

이하 5회 반복. 마침내 이해한 아버지.

 

아버지 : 그렇지! 그렇게 가나 이렇게 가나 마찬가지지.

 

카페가 다 올 무렵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허리 통증에 괴로워했다.

 

아버지 : 딱딱한데 5분만 앉아 있음 괜찮아져.

 

그러나 마땅히 앉을 데가 없었다. 다행히 카페는 바로 앞. 아버지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이 여행 후 아버지 걸음이 불안해 보여 이리저리 검색하고 간호사 지인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척 측만증이 아닐까 했다. 아버지는 무릎이나 다리는 멀쩡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걸음이 너무 위태로워서.

딸내미의 닦달로 병원에 가서 검사한 아버지. 척추측만증이 맞았다. 하지만 노화로 인한 거고 별달리 완화시킬 방법은 없었다.

 

아버지 : 나도 척추측만증이 아닐까 했어. 확실히 알게 되어 마음 편하네.

 

아마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던 터라 상심할 딸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인 듯. ㅠ

마땅한 방법이 없다니 속상하다.

 

카페에 들어가서...

 

나 : 아빠, 나 30분만 좀 걷다 올게. 잠깐만 기둘?

 

그러고 나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혼자 어제 걸은 금강과 미르섬을 더 멀리까지 걸었다.;;;;

 

아이가 있는 지인들이 애를 데리고 여행갈 때는 수영장이 있는 숙소로 가야 한다고 하더라. 애들 물놀이 하는 동안 쉴 수 있다고.

1박 2일, 짧은 시간이었지만, 보조 맞춰 걷기, 질문 공세에 답하기, 이해할 때까지 반복 설명하기, 등등으로 지쳐있었다. 잠깐이라도 혼자서 내 속도에 맞춰 걸을 시간이 필요했다. ㅠㅠ

나이가 들면 애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이 말도 맞지만 사실 울 아부지, 일케 나이 들기 전에도 같이 있으면 손 많이 가서 오래 같이 있으면 지치긴 했;;;;;;;; ㅋㅋㅋㅋㅋㅋㅋㅋ

 

5. 금강 드로잉

 

 

수채화가 감성적인 분위기를 내긴 좋은데, 이 방식은 잘 그리는 사람이 이미 너무 많다. 다른 말로 흔하다. 나만의 느낌으로 표현할 방법은 없을지 궁리하다...

 

 

노가다성 펜드로잉을 해보았다. 이 방식 그리기도 재밌고 나온 그림도 괜찮은데 무리지은 꽃에 입체감을 줄 방법은 없을지 고민이 필요하다.

 

6. 아미띠에 커피 둔치점

 

30분이 안 되었는데 아버지에게 언제 오는지 전화가 왔다. 목소리에서 쓸쓸함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혼자 카페에서 멍 때려본 적 없는 아버지다. 열심히 아부지에게 갔다.

 

나는 딱히 커피 생각은 없었고, 사장님도 주문 안 하고 가도 신경 안 쓸 분위기였다. 친구들이 찾아와 담소 나누는 중에 주문 들어오면 귀찮으니 안 시켜도 됨, 아우라가 느껴졌지만, 아부지는 마시라고 하고, 아부지 말은 듣는 게 좋으니까 커피를 시켰다. 크크-

 

별 그림 아닌데 아버지가 갖고 싶어 해서 넘김.

 

7. K 비전 안경

 

최근 책이나 작은 글자를 못 읽겠다는 아버지.

 

나 : 아버지 돋보기 맞춘 지 얼마나 되셨어여?

아부지 : 한참 됐지.

나 : 아부지, 안경 새로 맞춰야 해요. 나도 몇 년에 한 번씩 도수 검사해서 새로 맞춤.

 

검색해서 안경점 하나를 찍어서 택시를 타고 갔다. 이전 화에서 쓴 택시 일화는 이때 일이었던 듯.

 

 

 

직원은 친절했고, 아버지는 이전에 돋보기를 맞춘 안경점보다 검사가 더 다양했다고 만족했다. 안경이 나왔다. 신문을 본 아버지. 잘 보인다며 좋아했다. 나도 덩달아 기뻤다.

 

후일담.

집에 온 뒤 이상하게 글자가 잘 안 보인다고 함.

 

나 : 그때 안경점이 겁내 밝았잖아여. 집의 조도를 올려보면 어떨까요?

 

아버지는 조명가게에 가서 집의 조명을 더 밝게 바꿨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했다.

 

아버지 : 그때는 왜 잘 보였을까?

 

그러게. ㅠㅠ

 

아버지 : 오래 보면 글자가 겹쳐 보여.

 

어쩌면 그때는 잠깐 글자가 잘 읽히는 지만 확인해서 인지도 모른다. 책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한 번에 10분~15분 정도 보면 글자가 겹쳐 보여 눈을 쉬어야 한다. 마음이 아프다.

 

나도 안압이 높아 주기적으로 추적검사를 하고 있다. 책은 내 인생과 같기에, 눈, 지켜야 해. ㅠ

 

8. 집으로

 

 

갈 때는 우등 올 때는 프리미엄이었다. 갈 때는 프리미엄은 시간대가 안 맞았음. 당연히 프리미엄이 더 편함. ㅋㅋ

 

서울에서 아버지는 저녁을 먹고 가자고 했다. 나는 하루 집에 못가서 냥이들 걱정된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 고양이가 있지. 얼른 가!" 했다.

 

이 여행기의 도입부에서, 아버지에게 잘해야지, 라고 썼고, 지금도 그 마음은 같다. 그런데 이때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

 

카페는 버스터미널과 아주 가까웠다. 버스터미널로 가는 내내 아버지는 이 길이 맞는지 물었다. ... 맞아여. ㅠㅠ

 

나 : 이 길 끝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버스터미널 정문임.

 

이 말을 수차례 반복함. ㅋㅋㅋ

그런데 보통 버스터미널에는 카페 등등이 붙어 있기도 하잖아.

문제의 '이 길' 끝에 거의 다 온 자리에 카페가 있었다.

 

아버지 : 오, 저기구나.

 

카페에 들어가려 하심.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녹내장으로 인해 야맹증이 심해진 아버지는 초저녁도 한밤중처럼 어둡게 느껴짐. 카페 내부가 좀 어두웠음. 그래서 정확히는 안 보이지만 문처럼 보이니 고속터미널 입구라고 생각한 거.

...... 걷기 힘들어 문이 보이기 무섭게, 문이길 바라는 희망으로, 저긴갑다! 했을 수도 있음.

 

그러나, 낵아, 오는 내내 말하지 않았던가. 길 끝에서 좌회전이라고. ........ ㅠㅠ

 

나 : 아버지, 거긴 카페예요. 고속터미널 입구는 조금 더 가야 함.

 

4~5회 반복 설명.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일이 내 인내심을 다 소진함.

 

그래서 아버지와 저녁까지 먹을 자신이 없었다. 정확히는 방긋 웃을 자신이 없었다. 자칫 훅 신경질을 내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찾아왔다.;;;;;;;

 

신경질을 내도 후회할 것이고, 저녁을 먹지 않고 가도 후회할 것이다. ㅠ

나는 후자를 택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이 글 도입부에 아버지에게 잘하리라는 다짐을 썼거늘... ㅋㅋ

그러나 아버지와 낵아 알아온 세월이 있지.

저녁까지는 힘들 거라는 예감이 이미 있었다.;;

1박 2일로 잡은 것도, 2박 3일은 자신이 없어서;;;;;;;;;;;

 

가을에 한 번 더 아버지와 여행을 갈까 한다. 가을에는 저녁까지 먹고 헤어지는 걸 목표로.

2박 3일이 가능할 지는 두고 보는 걸로.

사랑해여, 아부지.

 

9. 여행 경로 기록

 

 

둘째날 그리려다 무령왕릉 그릴 곳을 안 남겨서;; 어쩔까 하다 위에 이거저거 붙여버림. ㅋ

(24.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