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 전 ㅈㅁ에게 울적해서 1박이라도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을 카톡으로 했다.
ㅈㅁ은 대답하지 않았는데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여행 가자", "여행 가고 싶어."는 "맛있는 거 먹고 싶다." 처럼 입버릇처럼 나오는 말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 ㅈㅁ에게 카톡이 왔다. 당시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답을 못해서 미안했다며 원흥에서 1박하고 다음 날 북한산 등반하자며 숙소도 알아보고 코스까지 짰다. 막상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고마웠고 진심으로 감동 받았다.
2. 25일, 느긋하게 일어나서 짐을 쌌다.
1박에 챙겨갈 게 뭐 얼마나 있겠어. 짐 금 방 싸니까. 그런데 화장을 시작하는 바람에 짐이 많아졌다.
이거저거 챙기느라 치간칫솔이라거나 충전 케이블 따위를 깜빡함. 크앙-
ㅈㅁ이 예약한 호텔이 베란다에 욕조가 있어서 수영복 챙겨가려고 했는데 그것도 까먹었다. 아이고야. ㅋ
ㅈㅁ은 퇴근하고 올 터라 나에게 먼저 가서 체크인 하라고 했다.
3. 삼송 역에서 내려서 창릉천을 따라 원흥까지 걸었다.
그냥 걷고 싶었다.
하늘은 탁했고 겨울이라 마른 창릉천은 을씨년스러웠다. 똑같이 생긴 아파트가 늘어선 모습이 풍경에 황량함을 더했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모든 것이 규칙적이고 획일적이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미로였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그 문장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아파트란 뭘까?
집은 사람이 사는 곳, 살만한 곳이어야 하는데 어떤 이들은 너무 열악한 곳에서 겨우 살고, 어떤 이들은 더 돈을 벌기 위해, 어떤 이들은 미래의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며 거액의 빚을 져서 집을 산다.
이날 그림을 그리려고 신문에서 열심히 건물 사진들을 오려놨는데, 저번 용산 산책 때처럼 재미난 게 나와 주지는 않았다.
4. 체크인을 했다.
숙소는 어반이스트호텔.
ㅈㅁ을 기다리며 화장을 더 했다. 화장 시작한 지 며칠 안되었을 때이다. 베이스는 샀는데 쿠션/파우더가 없었다. 오다 올리브영에서 산 퍼프로 섀도나 쿠션이나 하며 섀도 중 내 피부색과 비슷한 걸 덕지덕지 바름. <-- 무식하면 용감함.
혼자 흥이 올라 신나게 바른 끝에 ㅈㅁ에게 "무섭다, 떨어져서 걸어라." 소리를 들었다. 크아앙-
ㅈㅁ은 "피부랑 입술만 해."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눈화장에 로망이 있는데 내 눈이 눈화장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오랜 지인이 내가 처음 화장하고 나온 모습을 보더니 "30여 년 간 화장품에 돈을 날려온 '언니'로서 조언하노니, 바비 브라운에서 20만 원어치 제품 사면 메이크업 강습해주니까 배워라, 그게 돈이 덜 든다." 라고 했다.
이후 결국 바비브라운에 가서 배움. 눈썹 그리는 법 정말 잘 가르쳐 주심. 눈화장에 로망 있다고 하니 애 써 주셨는데 조심스레 "피부랑 입술 위주로 하시면 어떨까요."라고 함. 크아앙-
왼쪽만 속쌍카풀이고 오른쪽은 쌍카풀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주름인가 쌍까풀인가 싶은 선만 있어서 눈화장 하기 까다롭다. 하지만 눈화장 포기 못해. 크아앙-
이날 올리브영에서 속눈썹 영양제도 샀다. 속눈썹 영양제라는 거 효과 있더라. 진짜 속눈썹이 두꺼워지고 길이도 길어진다. ... 다만 내 얼굴을 샅샅이 보는 내 눈에만 보이는 정도라는 게 함정. 깔깔-
5. ㅈㅁ이 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카드키가 필요해서 내가 내려가서 데려옴. ㅈㅁ은 주차장이 일방향이라며 멘붕 옴.
그러니까 들어가는 차와 나오는 차가 마주치면 어느 한쪽이 뒤로 물러서줘야 하는 상황.
ㅈㅁ이 들어오다 그 상황에 처했는데 운전에 능숙한 쪽이 뒤로 빼줬다고.
ㅈㅁ : 야, 여기 힘들다.;; 차 가지고 오면 안 되겠다;;;;
북한산 가려고 차를 가지고 왔던 것.
하지만 베란다에 티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건 좋았다. 겨울엔 춥고 봄~가을에 오면 야경 감상하며 술 마시기 괜찮을 것 같다.
ㅈㅁ 기다릴 때 반신욕이라도 해볼 걸. 이건 지나가고 나니 아쉽네. 화장에 정신 팔려 산만해졌었다. ㅋ
가급적 화장품/기초 케어 등등을 다 비건으로 하려고 했는데 화장하면 심해지는 입가 버짐 해결이 안 되어서 주변에서 이런저런 기초 제품을 추천받았다. ㅈㅁ도 추천하며 비건을 쓰더라도 하나 쯤은 피부 잡아주는 걸 쓰라고 권했다.
이때는 피부과에 가기 전이라 단순한 버짐이 아니라 아토피라는 걸 몰랐을 때.
그래서 집에 스킨케어 제품이 어마무시하게 쌓여 있다. 유통기한 별로 줄 세우고 열심히 바르는 중. 크아앙-
다행히 처방받은 아토피 크림을 며칠 바르자 괜찮아져서 화장하는 데도 문제 없고 비건 제품으로 사도 되겠다 싶다.
6. 양꼬치를 먹으러 갔다.
양꼬치를 사랑하는 ㅈㅁ. 비쌌지만 맛났고 구워주니 편했다. 기본으로 나오는 산더미 숙주 나물도 좋았다.
숙소 바로 앞이다.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신나게 먹고 마셨다.
가지 튀김을 포장해서 숙소에서 2차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싸. 우리가 원한 건 자극적인 어향가지였다! 그런데 가지튀김을 주문한 것이다! ... 이미 늦었다. 깔깔-
가지튀김은 손 겁내 많이 가는 음식이었는데 진짜 맛있었기 때문에 만족.
더해서 젓가락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안했다는 걸 깨달음.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연장, 손가락으로 먹기로 함. ㅋㅋ
양념 범벅 어향가지였으면 큰일날 뻔했지 뭐야. 깔깔-
ㅈㅁ이 휴지를 가져오려 화장실에 갔다가 휴지걸이 가운데 심까지 가져왔다.
나 : ... 왜?
ㅈㅁ : ....... 어;;;;;;; 그게 딸려왔어;;;;
휴지 빼다 심이 빠진 듯. 나중에 도로 끼웠음.
충청도식 드립을 치고 싶어 둘 다 머리를 굴렸으나 마땅히 떠오른 게 없었다. 아쉽다.
충청도는 삼국시대 접점지에 있다 보니, 상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야 해서 말을 느리게 하기 시작했고, 눈치를 봐야 해서 돌려 말하기가 발달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돌려말하기 보다는 돌려까기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
내 생각에 충청도 화법은 저항의 언어다. 눈치만 보고 숙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재치와 해학을 넣은 게 아닌가 싶다.
상대 입장에서 따지자니 자기가 속이 좁은 것 같은 선에서 할 말을 하는 거랄까?
7. 자정 넘어까지 폭풍 수다.
혼자 일하는 직업이라 사람과 말할 기회 생겨서 씐남.
ㅈㅁ도 일하며 말하는 건 기운 빠지는데 이런 수다는 회복이라고 함. 크캬캬
ㅈㅁ과 나눈 이야기.
1) 내가 **당을 찍어왔다고 생각 못한 정명.
지금까지는 **당을 찍어왔으나 이때는 진짜 고민하고 있었다.
2) 서로 좋아하는 배우가 너무 달라.
둘 다 여리여리한 미형의 남자 배우를 좋아하는데, 그 미형의 기준, 여리여리함의 기준이 달라.
피차 상대가 좋아하는 남자배우는 미형보다는 남자답다고 여겨! 크앙? ㅋㅋㅋㅋ
3) 문득 내가 구남친 이야기를 했다.
헤어진 뒤 이야기한 적이 없어서 ㅈㅁ이 조금 의아해했다.
여자저차했던 일들로 동면 들어갔던 연애세포가 조금 활성화될 기미가 보여 난감하다.
동면 상태가 편하긴 했다. 연애라는 게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기에 문득 옛 생각이 났던 것이다.
구남친은 선량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구남친 상황 상 내가 먼저 연락하기도 만나기도 어려웠는데 구남친이 수시로 연락해주어서 괜찮았다.
ㅈㅁ은 그런 사소한 연락 귀찮고 리액션할 게 없다고 했다. 별 일 없으면 연락 안 했으면 좋겠다나?
심져 ㅈㅁ이 자기 구남친의 이름을 순간 기억 못함.
........................... 어이;;;;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심 빵 터짐.
ㅈㅁ : 만잘연뜸이 좋아.
나 : 엥? 그건 너무 ㅅㅍ아냐?
나는 연애와 ㅅㅍ를 가르는 기준은 일상을 공유하는가, 공유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한다.
만날 날 잡을 때면 연락해서 만났다가 헤어지는 ㅅㅍ에 가깝지 않나?
그런데 ㅈ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구나, 역시 사람은 다 달라.
ㅈㅁ과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도 서로에 대해 몰랐던 걸 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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