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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아버지 팔순 맞아 간 순천 - 24.11.15~16.

by 운가연 2025. 5. 12.

0. 아버지 팔순이었다.

 

작은어머니가 몇 달 전부터 아버지 팔순되면 순천으로 내려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아버지의 환갑과 칠순을 챙기지 않았다.

작은어머니가 몇 번이고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팔순도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아버지와 아주 가깝다. 자주 사랑한다고 말하고, 매달 한 번씩 만나 밥을 먹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전화하다가 얼마 전부터 매일 전화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은 25년 5월이다.)

 

다만 생일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이건 아버지의 책임이다. *당당*

 

아이들은 생일이라는 걸 모른다. 부모/어른/주위사람이 아이에게 생일을 알려주고 축하해주면서 생일은 축하를 주고받는다는 걸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생일을 모른다. *두둥*

아버지가 날 사랑한다는 사실은 의심한 적이 없다. 생일을 모를 뿐이다. 우리 시대 아버지들은 많이들 그랬다. ㅋ

 

그래서 아마도 20대 어느 무렵, 아버지가 생일과 어버이날을 그냥 지나치는 것에 대해 서운함을 보였을 때 당황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어린이날을 챙긴 적이 없다;;

어린이날도 부모가 챙겨주며 자연스레 어버이날도 알려주는 거 아닌가?

아이들은 사회 예의를 어른/주변사람들에게 하나씩 배워나가는 거잖아.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거 아니라고.;;;

 

여차저차해서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꽤 오래도록 가족끼리는 원래 생일 안 챙기는 줄 알았다. 그러다 문득 주변 지인에게 물으니 가족끼리도 챙기더라. 헤에;;;;

 

나는 내 생일을 포함 주변 생일을 챙기지 않는다. 20대 까지는 고딩 친구들과 같은 달 생일인 애들끼리 밥도 먹고 선물도 주고받고 했었다. 다들 만날 수 있는 날짜 잡는 거니 생일 당일에 보기는 힘들었고. 그러다 다들 바빠지면서 흐지부지 된 후 생일에 대해서는 아무 개념 없이 살았다.

남자친구와 생일 당일을 보내 본 적이 없는데, 장거리 연애였던 터라 당일에는 볼 수가 없었기 때문.

생일 당일에 뭘 한 기억은 초딩 이후 몇 번 없다. 카카오톡 등등 프로필에 내 생일 다 비공개로 해두는 편. 생일 축하 받기 번거롭다. 축하 받으면 나도 챙겨야 하는데 힘든 거.;;;

 

30대에 들어서서 어버이날이면 아버지 사무실에 꽃바구니를 보내기 시작했다. 생신도 몇 번은 챙겨서 같이 밥을 먹었다.

아버지가 퇴직한 뒤 생신을 다시 건너 뛰기 시작했다.;;;

뭐랄까, 사무실로 꽃바구니를 보낸 건 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였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할까? 집으로 꽃바구니 보내봐야 시들면 버리는 게 일이잖아. ...

그래서 아버지 생일/어버이날 챙기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하고 뭐 그러했다.

 

내 생일은 24년에 딱 한 번 아버지에게 축하받아 봤다. 한 달에 한 번 밥 먹는데 진짜 어쩌다 우연히 내 생일로 날이 잡혔기 때문이다. 그날 문득 아버지에게 말했다. "나 생일이다. 나도 한 번쯤 축하한다는 말 들어보자."

아버지는 억지로 할 수는 없으니 기다려 보라고 했고, 내가 생일인 걸 고새 까묵은 시점에서 축하한다고 이야기했다.

... 뜻밖에 뭉클했다.;;;;;;;

 

그래도 팔순 챙길 생각은 못했던 나;; 아버지에게 내 생일 또 축하받을 생각도 없;;;; 아버지가 나 사랑하는 거 잘 알고 있다.;;;

 

뭐, 암튼 작은어머니가 거듭 말해서 아버지 손잡고 순천 내려감.

 

1. 아버지가 라면을?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ㅁㅈ가족과 16일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움직이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15일 오후 기차로 내려갔다.

아버지와 단둘이 기차를 타고 순천에 내려간 적이 있나? 없을 걸?

 

큰 사촌동생 ㅁㅈ이 결혼해서 명절에 시댁에 가 얼굴을 못 보게 되더니 작은 사촌동생 ㅎㅈ마저 결혼해서 못 보게 된 뒤 나도 안 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마지막에 간 게 17년인 듯.

1박~2박 아버지 시중 들기가 버거웠다. 우리 아버지 진짜 손 많이 간다.

ㅁㅈ, ㅎㅈ마저 못 보자 가는 보람이 사라졌;;;

이후에는 아버지 혼자 내려갔다. 

 

근 7년 만에 내려가는 순천이었다. 아버지는 순천역에서 내리면 늘 가는 분식점에서 김밥과 라면을 먹는다고 했다.

아버지가 김밥과 라면을 드신다고?!

울 아버지가, 낯설다;;;

김밥과 라면은 음식으로 취급도 안하던 분이었는데;;;;

 

2. 아버지가 늘 머문다는 모텔에 갔다.

 

아버지 : 방 따로 쓰자.

나 : 좋져!

 

이전에는 방을 같이 썼었다. 아버지는 숙소는 잠만 자면 된다고 생각해서 굳이 넓고 좋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화장실에서 옷 갈이입고 나오기 등등 귀찮긴 해도 나도 하루이틀만 참으면 되니까.

그런데 방을 따로 쓰자고 하심. 아이고 신나라.

 

아버지도 나와 같이 방을 쓰기 불편해진 거다.

아마도 지난 공주 여행때부터 였던 것 같다.

나이 들면 자다가 화장실 가고 싶어져서 깨게 된다. 낯선 숙소고 야맹증이 심해서 화장실을 못 찾았고, 내가 깨서 찾아드림.

그게 미안하고 신경 쓰였나 보다. 아버지도 안약도 넣어야 하고 이거저거 해야 하는데 내가 옆에 있으면 괜히 불편하기도 할 테고.

 

방을 혼자 쓰게 된 건 너무 좋았다. 소소하게 시중 들어야 하는 게 많아서 나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2. 16일.

 

ㅁㅈ이 열두시에 우릴 데리러 순천역으로 온다고 했다. 아버지와 나는 그동안 순천역 근처 개천을 산책했다.

순천동천

 

 

걷다가 아버지가 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호두과자 파는 카페에서 호두과자를 한 상자 포장하고 앉아서 잠시 쉬었다.

 

이게 작년(24년) 11월 일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버지의 나이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운동하고, 한두 시간 걸으니까, 아버지의 상태가, 그러니까 어디 아픈 게 아닌 노환으로 인한 체력 저하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녹내장으로 인한 야맹증으로 초저녁만 되어도 제대로 못 보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낮에는 잘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장수했으니 유전적 유리함이 있을 거라는 것, 자주 보는 만큼 조금씩 악화된 아버지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한 것, 무엇보다 아버지니까, 단지 그 이유만으로 방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