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3년 정도 전부터 옛날 일기, 주고 받은 손편지를 정리하고 있다.
라면 상자 하나 분량에 기억도 나지 않는 초딩 같은 반 친구가 보낸 생일 축하 카드부터 별 게 다 있었다.
두세 개는 남겼다. 가지고 있고 싶은 글귀가 있는 편지다. 여전히 기억나는 글귀고 그 글귀가 있는 편지가 언제 나올지 궁금해했다.
한때 몹시도 좋아했던 ㅎㅇㅌㄲ언니. 몇 년 만에 전화가 와 반갑게 받았다가 내용에 당황했던 기억. 그러니까 이 사람은 그때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구나. 세월이, 삶이, 이 사람을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했구나.
그 언니와 주고 받은 손편지가 있더라.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기억에 남지 않으면 애초에 의미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가볍게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데, 버리는 것도 쉽지 않다. 버리는 게 쉬우면 이렇게 이고 지고 다니지 않았겠지.
자의식 과잉 인간이라 소소한 스케줄러 하나하나까지, 이사할 때마다 이고지고 다녔다. 이제는 작별하기로 결심해 놓고도 정리한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가 넘치는 자기애의 증거지. 깔깔-
2. 2004년 마린 블루스 다이어리
한때 종이 다이어리를 열심히 썼었다. 2004년에는 마린 블루스 다이어리, 스노우 캣 다이어리, 마리캣 다이어리까지 무려 세 개를 샀었다. 각기 다른 용도로 쓰려고 결심했었다. 다른 용도로 쓸 세 개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세 개 다 갖고 싶었기에 용도를 정했던 거.
마린 블루스 다이어리는 줄 없는 공책에 그림이 살짝 들어간 거라 일기로 썼고, 스노우 캣 다이어리는 일정 관리 등을 했고 마리캣은 어떻게 쓸까 하다가 좀 쓰다 말아서 거의 새 거다.
스노우 캣 다이어리는 진짜 실용적이고 좋았다. 꼭 필요한 것만 있는 느낌이었다.
스노우 캣과 마린 블루스는 아는 사람은 아는 일상툰의 시조새. ㅋㅋ
한때 다이어리 꾸미기를 하고 싶어했는데, 이쪽은 그림보다는 디자인의 영역이다. 요 몇 년 사이에 시작해 봤는데 영 시원치 않다. 그래도 자기 만족으로 이따금 즐겁게 하고 있다.
3. 기억나는 내용들은 이러하다.
1) 두꺼운 표지를 넘기자 당시 남친의 사진이 뙇! 하고 나왔다. 다시 봐도 예쁘군. - 지극히 주관적 -
온화하고 심지가 굳고 속이 깊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때의 나는 소소한 일로 참 많이도 삐쳤다. ......;;;
남친과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삐친 내용들을 정말이지 가감없이 적었더라. 손발이 침낭 말듯 둘둘 말렸다.;;;
2) 번역가가 될까 했었군!
내 일이 먹고살기 팍팍한 지라 제2의 직업으로 번역가가 어떨까 하고 영어 공부를 했었다.
이때는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하찮았다. 그렇게 공부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
결국 번역가는 되지 않음. 영어 못함. 파파고가 있으니 여행은 괜찮아. 깔깔-
3) 사이버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진짜 열심히 했고, 나중에 총장? 우리과 총담당? 교수가 바뀌며 뭔가 나랑 안 맞다는 느낌이 들어 중단했다. 졸업하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내 평생 자신해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 있었나 싶고 좋은 기억이다.
4)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다.
하고픈 일은 있는데 먹고사니즘은 해결해야 했고, 취직 대신 알바를 하던 시절.
5) 과거의 인연
한때 친하고 가까웠으나 다시 못 볼 관계가 된 사람들의 이름이 마구 나오더군.
어쩌다 연락이 끊겨서 소식이 궁금한 친구도 있고. ㄱㅇㅇ, 잘 살고 있을까? 가끔 생각나.
6) 홈페이지
이때는 홈페이지였다. 내 홈페이지가 인기 있는 홈페이지가 되길 바랐다.
유명세에 대한 갈망은 정도 차가 있을 뿐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다.
이때 내 성격은 굳이 MBTI로 말하자면 E에 가까웠고 지금은 I에 가깝다.
오래도록 홈페이지, 블로그 등 이거저거 열어보고 닫기도 해보았고 지금은 그냥 조용한 게 좋다.
어떻든 나는 무언가를 쓰고 기록해야 하는 인간이고, 가상의 독자를 상정할 때 글에 더 집중력이 오르기는 해서 몇 년 전 티스토리를 다시 열고 현재는 여기에 정착 중이다.
내 티스토리에는 광고가 없다. 광고 클릭하고 가요, 댓글은 일일이 반응할 필요 있나 싶어서 놔두고 있다. ㅋ
7) 나 자신은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시간을 허투로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 ㄱㅅㅎ ㅅㅈ님이 자녀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자기가 보기에는 너무 답답했던 것이다.
아마도 마린 블루스 다이어리를 읽고 난 후여서 대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놔두세요. 고민하는 것도 무언가를 하는 거라, 자기 자신은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 거거든요.
저 그 나이 때 진짜 게을렀어요. 근데 그때는 게으른 지 몰랐어요.
그때를 자책하기 때문에 지금 손목 뽀개지도록 열심히 작업하는 거예요."
사실 지금도 내가 충분히 부지런히 산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충분히 부지런히 산다는 건 어떤 걸까.
현대 사회, 특히 대한민국이 여유 시간을 가질 새 없이 사람을 몰아치는 걸까,
내가 진짜로 게으른 걸까,
내가 바라는 만큼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기에, 내가 열심히 하지 않/못해서라고 나를 질책하는 걸까.
8) "한 번 사는 거 멋지구리하게 남들 하는 거 다 해 보고 남들 안하는 우리 하고 싶은 것도 몇 가지 더 하면서 살자고."
ㅇㅈ이 이 말을 2004년에 했고나.
이 말은 내게 꽤 오래도록 각인되어 있었다. 남들 다 가는 유명한 곳 여행도 다니고, 거의 아무도 가지 않는 곳도 가보고, 많은 걸 하며 살아갈 줄 알았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빨리 흘렀는지 모르겠다.
9) 이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
내일은 똑바로 살자, 내일은 이따구로 살지 말자, 와, 이거 지금도 내가 자기 전에 종종 마지막 문장으로 쓰는 건데.;;;;;;
이 외에도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이 순간 당장 내가 하고픈 일에만 몰두하며 살고 싶다, 그래도 될까, 그래도 제대로(먹고사니즘을 해결하며) 살아질까, 같은 생각은 지금도 한다.
작업에 몰두할 때의 충족감에 대한 열망, 미치도록 몰입해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갈망도 변함 없다.
10) 달라진 것
예민한 자기 혐오들은 많이 줄었다. 아예 없어지진 않았지만 줄기는 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바꾸려면 흡연자가 담배를 끊는 것만큼 치열한 노력과 부단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사소한 일에 우울해지는 것도 나아지기는 했음을 느낀다. 역시 아예 없어지지는 않았다.
주인공이 정신과 상담을 받는 김형경의 소설이 있었다. 거기서 정신과 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달라져도 5퍼센트예요. 그런데 그 5퍼센트만 달라져도 삶이 편해져요."
(기억이 의지해서 쓰는 거라 정확하지 않다.)
저 문구가 내게 큰 위안이 되었던 걸 기억한다. 20년 전과 나는 고작해야 5퍼센트가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낫다.
11) 이때 하던 작업물들
결국 세상에 내보냈다. 그걸 생각하면 뿌듯하기도 아쉽기도 하다. 뿌듯한 건 발표를 해내서, 아쉬운 건 내 바람 만큼 성과를 내지는 못해서.
4. 마린 블루스 다이어리는
재밌는 그림들이 있어서 다꾸에 활용하기로.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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