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란 인간, 자기애의 끝은 어디인가.
근 30년 된 다이어리들을 이사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
이 다이어리를 정리하며 생각난 건데, 안 버린 이유 중 하나가 일기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읽으면 어떨지 궁금했었다.
창작에 뜻을 품고 있었느니만큼, 나중에 이때를 돌아볼 때 얻는 게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26년이 흘러 지금 본 기분이 어떻냐고?
악필이라 도저히 못 읽겠다. ...
2. 이 다이어리는 지금도 기억하는데 무려 4만원이었다.
다이어리 하나에 지출하기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고액이다.
무려 두 개 샀다.
똑같은 다이어리를 가지고 있던 친구는 꽤 오래 전, 내 쪽에서 잘랐다.
학창시절 친구들끼리 하던 이야기가 있다.
친구로 지내다가 좋아하게 된 사람에게 고백하는가, 마는가?
마는가, 를 택하는 사람들의 답은 이러했다.
친구면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지만, 고백했다가 거절 받으면 어색해지잖아.
우정도 영원하지 않다.
상대방이 날 밀어낸 경우도, 내가 밀어낸 경우도 있다.
인간관계라는 건 본디 허망한 것.
자기애인지, 수집벽인지, 아무 생각 없는 건지, 우표 붙여 주고받던 손편지만이 아니라
(삐삐도 없던 시절인 '라떼'는 우표 붙여 손편지 주고 받는 일이 흔했다.)
초딩 때 친구가 준 생일/크리스마스 카드부터 교실에서 주고받던 쪽지까지 상자 하나에 다 담아두고 있었는데
작년에 한 번씩 차근차근 읽고 두어 개만 남기고 작별했다.
이 다이어리 친구가 보낸 편지가 꽤 많았는데 "너 왜 이렇게 나에게 잘해줘?" 라는 구절이 자주 보였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건 아니다. 새삼 나도 잘못한 거라며 날 탓하거나, 두고두고 한때 친구였던 아해를 미워할 마음도 없다.
옛 다이어리가 불러일으킨 기억일 뿐이다.
3. 나는 96학번이다.
대학교 1학년이었다. 다니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휴학했고, 다른 학교 시험을 쳤으나 떨어졌고, 결국 복학해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실감하지 못했던 남녀차별을 경험한 해이기도 하다.
교정에서 담배 피우는데, 남자 선배가, 남자 동기를 보내, 단지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담배 끄라고 했다.
역시 흡연자였던 남자 동기가 기겁해서 "야, 선배가 너 담배 끄래!" 라고 했다.
지금은 담배는 백해무익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지만
90년대~2010년대 초까지는 즉, 담배가 갑자기 4500원으로 오르기 전에는
남자는 괜찮아도 여자는 담배 피우는 거 아니었다.
그래서 "여자가 담배 피울 줄 알아야지." 따위의 소리를 하는 남자 선배가 "쿨하고 멋진 선배"였다.
동기의 말에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진 나는, 한 대 더 피고 선배에게 가서,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요지는 담배 피는데 남녀가 어딨음? 이었지, 뭐.
남자 선배 : 그래, 네가 그런 생각이면, 너는 피워도 된다.
저 때는 진짜 어이가 없었다. 뭔데 허락?
지금 보면, 편견/사회의 당연한 인식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몇 마디 말 나누고 저 정도 말을 했으면, 꽤 괜찮은 사람이었던 거다.
저때 여자 선배가 "도와 주지 못해서 미안해." 라거나 "널 보며 여자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느꼈어." 라는 말을 했다, 고 다이어리에 쓰여 있었다.
남자 동기들은 "나는 너 이해해. 그런데 아직 사회가..." 라는 말을 했다.
"이해해." 라는 말은 얼마나 허망하고 하찮은 말인지. 그 뒤에 붙은 "그런데..."는 말할 나위가 없고.
지금은 성소수자들이 듣는 말 아닌가.
여자 동기 중 한 명은 "나도 피는데, 옥상에서 몰래 피우고 냄새 다 지우고 내려와. 어떻게 대놓고 피냐?"고 날 나무랐다.
96년에는 그랬답니다. ...
다시 태어나면 담배 안 피울 거야. 백해무익함. ㅠ
덧붙여 1년 휴학하고 학교에 돌아가니, 남녀 할 것 없이 다 피우고,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었다.
......... 1년이면 무너질 걸, 그렇게 날 잡았나?
한 해 사이에 분위기가 반전되며, 이제 대학생인데 뭐, 하고 피우는 여자애들이 많아지니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게 된 거였던 걸로 기억한다.
쪽수가 답인가. .....
4. 잊고 있던 이름, 기억나지 않는 이름, 보고픈 친구들의 이름이 있었다.
이따금 안부가 궁금해지던 친구의 집번호 - 삐삐도 없던 시절 ㅋㅋ - 가 나와서
용기를 내 걸어보았으나 결번이었다. ... 결번이 아니길 기대한 게 무리지. ㅋ
보고서야 생각난 이름들도 있었고, 저때 한창 친하다가 연락이 끊겼다가,
페이스북으로 다시 알게 되어 페친으로 남은 경우도, 오프라인에서도 다시 만나게 된 친구들도 있다.
5. 나는 20대 초중반을 중2병 시절로 기억한다.
스무 살 넘으면 사람 안 바뀐다, 는 둥, 갖은 허세어린 말을 하고 다니던 시절이 일기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저게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는지(...)
예나 지금이나 작은 실수에 연연하고 작아지는 건 여전하구나, 싶기도 하다.
지금은 나만 보는 일기에도 걸러 쓰는데 정말이니 깜짝 놀랄 만큼 적나라한 내용들이 있었다.
만화가를 꿈꿨었고, 만화 학원을 다녔고, 인천까지 지인의 집에 가서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지금은 길이 달라졌지만, 간간이 일상툰을 그리고 있다.
이번 생, 극만화를 그려보기는 무리.... 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쯤 도전해 보고픈 마음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6. 이미지가 없이 온통 악필 일기일 뿐이라 다꾸할 거리가 없었다.
암호해독하듯 좀 읽고 누가 볼 새라 냉큼 정리했다.
이런 무서운 건 간직하는 거 아니다.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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