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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

수첩을 정리했다 - 15.10.12~16.03.17

by 운가연 2023. 7. 30.

이 수첩에 쓰인 글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내 또래.

 

1. 싸이월드에 다녔던 누군가가 준 걸, 몇 년 뒤에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 쓰고 난지 7년이 지나서야 열어 보고 작별하기로 했고 말이지.

아, 나란 인간. 물건을 버릴 줄을 모르는 인간. 그냥 싸안고 사는 인간.

 

2.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갈 때 가지고 다니며 썼다.

 

대기 시간에 낙서하고, 진료 마치고 식당에서 음식 나오기 전에 주변 사물 슥슥 그리고, 선연습도 했다.

짧은 선을 자유롭게 쓰며 명암을 넣는 친구가 부러웠다.

친구가 짧은 선 낙서를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짧은 선이 자유롭게 써지더라 했다.

그 말에 나도 짧은 선 낙서하며 노력해 봤는데 아직 익히지 못한 기술.

다시 연습해 보고 싶어진다.

 

3.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었다.

 

꼭 그림 그리기 용 스케치북 사야 하나. 아무데나 영혼이 시키는 대로 슥슥 샥샥-

그러고 싶었다.

병원과 식당 풍경도 그리고, 숟가락, 컵 따위 소품도 그리고, 선 연습도 하고

공연이나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표도 붙였다.

 

자유롭게 쓰긴 했는데 근사한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사람 안 변해서, 이 로망은 지금도 있다.

그래서 내 책장에는 10년, 20년 된 어디서 사은품으로 받은 수첩이 고스란히 꽂혀 있다.

로망만 지니지 말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

 

팡이로 인해 물건을 버리고, 도배를 새로 하며, 다시 종이 그림에도 열의를 보이게 되었다.

이 종이들 다 쓰고 갈 테다. 깔깔-

 

그래도 이 수첩을 보며 그림 잘 그리고 싶어서 나름 열심히 노력했다는 건 느꼈다.

그런데 계단을 하나 오르지 않으면, 무언가 단계를 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그려도 제자리일 뿐 더 오르지 못하는구나, 라는 것도 절감했다.

그렇게 넘들을 그렸었는데, 그때도 느꼈는데, 정말이지 징하게 늘지를 않았다.

ㅎㅊ 쌤의 드로잉 강좌가 내가 한 계단을 오르게 해줬다.

드로잉은 확실히 좋아졌다.

그리고 또 이 단계에서 멈춘 채 성장을 못하고 있지.

 

4. 가끔 봐도 오래 보자

 

손바닥만한 이 작은 수첩에서 한때 몹시 좋아했으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새삼 30년 넘게 이어온 인연들을 떠올렸다.

사이에 굴곡도 있었고, 각자의 삶을 살다 훌쩍 시간을 건너뛰기도 했으나

어쩌다 한 번 연락을 주고받으면 또 꾸준히 보는 관계,

오래도록 보지 못했는데도 불쑥 카톡을 보내, 살아있나, 툭 안부를 물으면

그 짧은 한 마디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충만한 감정으로 나를 채우는 관계,

짧은 안부나마 주고 받았다는 사실에, 나를 잊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반가운 관계,

그러다 어느 날 보면 어제 만났던 것처럼 폭풍 수다를 떨 수 있는 오래된 관계들.

 

얼마 전 20대 후반, 내 마지막 파트 타임 아르바이트 때 만났던 아해들과 술을 마셨다.

이 인연이 이렇게 오래 갈 줄 피차 몰랐다.

헤어지기 전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 봐도, 오래 보자."

 

5. 그리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아해들 셋이 담겨 있었다.

 

그리움이 더 크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어여쁜들을 떠올리면 9.9할이 미안함이다.

 

10. 몇몇 페이지를 뜯어 다꾸를 했다.

 

양면으로 두 쪽 썼다. 쓸 내용이 많았다.

여기에 올리지는 않으려고 한다.

 

완성도에 상관 없이 아해들 그림만 남기고 다른 페이지는 모두 찢어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