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약 30분 정도 걸어서 장도에 도착했다.
장도는 진섬다리로 건널 수 있는데, 밀물이 오면 잠기고 썰물이 오면 드러나서 입구에 다리가 바다에 잠기는 시간이 쓰여 있었다.
이날은 아예 잠기지 않았다. 우왕. ^^
바다에 난 야트막한 다리를 건너는 기분이 쏠쏠했다.
장도에는 복합예술공간이 개관되어 있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설렁설렁 섬에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복합예술공간이 있는 곳 답게 재미난 조형물들이 보였다. 전시관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월요일은 휴관이었다.
걷다가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물멍을 때렸다. 같은 듯 다른 듯 울리는 파도소리는 사람을 몽환적인 기분에 잠기게 한다.
이 직업에 들어선 일해 올초부터 중순까지 가장 바빴다. 바쁘다는 게, 마감에 쪼인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그러다 마감은 다가오는데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마감을 못 지킬까 불안했고 가까스로 해냈을 때는 커다란 충족감을 느꼈고, 나 자신이 고갈되고 있다는, 채워야 계속 작업을 이어갈 수 있으니 채울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초조함도 느꼈다.
그러다 6월 마감 두 개를 예정보다 빠르게 해치웠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떠나랴, 허겁지겁 예매하고 왔는데, 진짜 오길 잘했다.
작년 8월에 양평에 당일치기로 가볍게 다녀온 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당일에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곳에 가리라고 결심하고 어느덧 1년 가까이가 훌쩍 지났다. 바빠서, 컨디션이 안 좋아서, 하필 주말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프리랜서의 장점을 살리려면 평일에 가야지, 그러다 시간이 순삭된 것이다.
바다를 보며 남은 하반기는 전시회도 가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당일치기 나들이도 다녀오며 부지런히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 지킬까;;; ㅋㅋ
반바퀴 이상 돌았을 때 사촌 ㅁㅈ에게서 장도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ㅁㅈ이 장도에 들어와서 입구 가까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와, 몇 년 만이냐. 내 사촌, 너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고, 같은 항렬에서 막내가 어느 덧........ *먼산*
막내가 6개월 워킹 홀리데이 가기 전 우리집에서 하루 잔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옥탑방에서 살고 있었고, 어여쁜 두 나옹이가 있었다.
막내는 결혼했고, 나는 이사를 두 번 했고, 이제 그 아이들은 사진을 올리다 발견해도 전처럼 눈물이 솟구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잠시 앉아 근황을 이야기하다가 ㅁㅈ이 알아온 하모샤브샤브 집으로 갔다. ㅁㅈ에게 차가 있어서 확실히 이동이 편했다.
나 갯장어 샤브샤브 난생 처음 먹음. 무려 서비스로 낙지호롱이가 나옴. 덕분에 낙지호롱이도 처음 먹음. ㅋㅋㅋㅋ
서울은 밑반찬이 많지 않다. 지방은 기본 9첩 반상으로 화려하다 보니 혼자 여행 다닐 때 들어가기 참 애매해다. 너무 많이 남기고 나오게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아. ㅠㅠㅠㅠ
ㅁㅈ 덕분에 배 뚜들기며 거하게 한 상 먹을 수 있었다.
방아잎이라고 전라도 쪽에서 먹는 향이 강한 잎채소가 있는데, 나 이거 엄청 좋아함. 고수처럼 향이 강한 채소를 사랑한다.
진짜 신나게 먹었다.
마지막은 죽과 라면 중 택할 수 있는데 라면이 더 맛있다는 ㅁㅈ의 조언에 따라 라면. 와, 진짜 맛있었다.
딸 둘을 작은 어머니에게 맡기고 온 지라, ㅁㅈ은 가야 했다. 나는 크루즈를 탈 생각이라고 했다.
ㅁㅈ : 나 근처 사는데 크루즈 안 타봤어.
나 : 그런 거지. 나 서울 사는데 한강에서 유람선 안 타 봄. ㅋㅋㅋㅋ
ㅁㅈ이 밑반찬 중 개떡에 꽂혀서, 더 달라고 했는데 찌는 중이라 다 찌면 준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크루즈를 타러 나가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남. 서로 계산하겠다고 싸우는 화기애애한(ㅋㅋ) 실랑이 끝에 ㅁㅈ이 이겼고, 크루즈는 내가 결제하기로.
계산하는데 사장님이 마침 개떡이 다 쪄졌다며 포장해서 주시는 게 아닌가.
이렇게 손님이 많고 바쁜 가게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개떡을 주는 사장님 모습에 감동 받았다. 바쁘면 몸이 힘드니 친절하기 쉽지 않을 텐데...
감사히 개떡을 받아 크루즈 선착장으로.
예매하지 않아서 현장 결제해야 했다. 미남 크루즈와 이사부 크루즈가 있었는데 둘이 출발 시간이 조금 달랐다. 우린 미남 크루즈를 택함. 미남 크루즈라니. 아, 이름 너무 웃긴 거. 주말에는 불꽃쇼를 하고 평일에는 그냥 돈다고.
크루즈를 타고 여수 밤바다 야경을 즐겼다.
노을 지는 바다 풍경, 대기의 조화가 만들어낸 커다란 구름, 몇 해 만에 만나는 사촌과 함께 보내는 시간, 모든 게 근사했다.
그러고 보니 ㅁㅈ과 단둘이서 만나는 건 난생 처음인 것이다.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다 ㅁㅈ이 말했다.
ㅁㅈ : 언니, 우리가 지금 이렇게 여유로운 게 큰아버지(나으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에요.
나 : 아.......... 푸크크크크크크크
나 울 아부지 사랑한다. ㅁㅈ도 울 아부지 곧잘 따른다. 하지만 울 아부지, 진짜 손 많이 가는 사람인 것이다. 푸크크큭
해가 질수록 야경은 더욱 빛나갔다. 나중에 ㅁㅈ이 크루즈를 타봤는데 그때는 크루즈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머라? ㅋㅋㅋㅋㅋ
잠시 서울로 올라간 친구와 통화한 ㅁㅈ. 사진을 찍어서 보내니 친구가 "한남동에서 한강 바라보는 풍경 같다"고 하더라며 나에게 진짜 그런지 물었다.
나 : 몰라. ... 서울 살면서 서울 야경 제대로 구경해본 적 없어. ...
ㅁㅈ : ㅋㅋㅋㅋㅋㅋㅋ
나 : 그래두 서울은 한강이구 여수는 바다인디 강을 바다와 비교하믄 안대지.
ㅁㅈ : 아, 그런가?
대부분 대도시는 강을 끼고 발달했다. 서울은 수도 치고는 큰 편인데, 그게 한강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 중에서 큰 편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센느 강은 본 적이 없지만 가 본 사람이 생각보다 작더라고 했는데, 사실은 한강이 큰 편이랄까.
여수 바다는 구조 상 얼핏 강이나 커다란 호수처럼 보이기 때문에 한강이 떠오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버킷 리스트에 한강 유람선 타기를 넣고 싶어짐. ㅋ
ㅁㅈ : ㅈ저기 불빛 예쁜 데는 다 유명한 카페에요.
나 : 호옹.. 벽화 마을은 어때?
ㅁㅈ : 몰라요, 저는 차 타고 올라가서 카페만 갔어요.
나 : 푸크크크크크
글치, 머, 나도 서울 유명한 곳 거의 안 가봤지. ...
반딧불이 같은 케이블카가 공중을 오갔다. 저거 타야지. 꼭 타야지! 꺅- 했고, 진짜 탔다.
예쁜 야경이 보이는 곳은 사람들이 오밀조밀 모이기 마련. 크루즈에서 한가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역시나 불빛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한적함이 한적함 그 자체로 좋았다.
ㅁㅈ : 뭐가 없는 것도 좋다.
ㅁㅈ도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나 : 응, 여기도 좋다.
화려한 불빛을 보다가 고즈넉한 곳을 보니 그 모습 그대로 운치가 있었다.
ㅁㅈ은 날 숙소 앞에 내려다 주고 갔다. 나는 숙소에 와서 ㅁㅈ이 선물한 잠옷을 입었다.
ㅁㅈ : 좋은 잠옷은 삶의 질을 한 단계 올려준대요.
정말 그런 것 같다. 집에서는 오래된 면 티 입다가 예쁜 잠옷 입으니, 와인 잔에 맥주 따라 마실 때처럼 괜히 기분이 좋았다.
숙소 테라스에서 맥주 마시는데 하아, 파도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내일 일정은 아직 짜지 않았다. 느긋하게 일어나서 즉흥적으로 내키는 거 해야지.
하고 싶은 일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데 욕심에 견주어 게을러서;; 늘 하고픈 걸 다 하지 못하는 듯한, 쫓기는 기분에 사는데, 불현듯 찾아온 한가함에 푹 잠겼다. 여행이니까 가능하다. 여수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할 일 다 한 거잖아. ㅋ (22.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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