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오롯이 여수와 나만 보내는 날이었다.
첫날은 서울에서 여수로 왔고, 둘쨋날은 사촌을 만났고, 어제는 화상회의가 있었다. 내일은 사촌과 작은어머니를 만나기로 했고, 모레는 서울로 간다.
그러니까 하루종일 여수에서 나 혼자 있는 날은 5박 6일의 일정에서 이날 뿐이었다.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여행 와서 이렇게 사람을 만나고 회의까지 있던 건 처음이었다.
2. 항일암에 가기로 했다.
돌산도에 있는 절인데, 다리가 놓여 있어서 버스로 갈 수 있다.
버스로 한 시간 거리인 데도 느즈막히 일어나 게을게을 떨 거 다 떨고 숙소를 나왔다.
브런치를 먹고 가려고 검색했다가, 마음 바꿔서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배차 시간이 긴 편인데 도착해서 보니 곧 버스가 올 시간이었다. 갸아- ^^
바쁜데 게을러서 이렇다 할 정보를 찾지 않고, 대중버스로 가는 법만 찾아서 갔다.
이순신 광장 근처에서 111번을 타면 된다.
일출이 예뻐서 새벽에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나란 인간, 일찍 일어날 수 없는 인간. ㅋㅋ
그렇게 간 항일암은 내가 상상한 평범한 절이 아니었다.
헐, 나름 버스 시간표 찾느라 검색 안한 것도 아닌데 이 절의 아름다운 특색을 전혀 몰랐다니?
... 갸갹;;;
창밖 풍경을 보다 보니 한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항일암에 가는 길은 경사가 가팔랐다. 오르막길은 15분, 계단은 10분 걸린다고 했다. 저질 체력인 내게는 10분, 15분 거리일 리 없고, 5분 차이일 리도 없었다. ...
오르막길을 택한 건 1) 아무래도 계단이 더 힘들 것 같았고 2) 배가 고파서였다.
그런데 오르막길도 진짜 힘들었다. 경사가 제법 높더라고. 와, 계단으로 올랐으면 오르막길을 택하지 않은 날 미워했을 거야. 계단은 진짜 쉽게 지치더라고.;;;
식당들은 줄지어 있는데 막상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간장게장, 일인분 팔려나? 양이 너무 많아서 반도 못 먹고 나오면 아깝고 미안하지 않나. 파전, 역시 애매하고 아점으로 먹기에는 좀 기름지지. 파전은 안주야. 오옷, 해물라면! ... 문 닫았네?
해초비빔밥? 흐음... 감이 안 온다.
그렇게 선택장애에 시달리다 결국 항일암으로 오르는 숲길에 진입하고 말았다. *두둥*
계단을 통해서든 나처럼 오르막길로 온 사람이든 다들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당연하다. 짧지만 경사가 높아서 겁내 힘들다.
항일암에 들어섰다. 음? 저 바위 뭐지?
역시 항일암을 보러 온 사람이 자기 일행에게 "저기로 가는 거야." 라며 바위 사이 길로 들어섰다. 나도 얼결에 따라 들어갔다. 들어가서야 항일암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기암괴석 사이에 지은, 바위를 치우거나 깎지 않고 바위와 절이 혼연일체가 된 곳이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있는 타 프롬 사원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아마 사진으로 많이들 봤을 것이다. 거대한 보리수나무가 사원과 엉켜있는데,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다워 복원하지 않고 놔둔 곳이다.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었는데 항일암도 그러했다. 엄연히 스님이 수도하고 계신 곳인데도 고대 유적지를 탐방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몹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래서 이번 화는 사진이 많다.
항일암은 무려 신라 시대에 원효대사가 시작한 곳이었다.
아래는 여수 관광문화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 도량인 향일암(向日庵)은 돌산도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의 원효대사가 선덕여왕 때 원통암( 圓通庵)이란 이름으로 창건한 암자다. 고려시대에는 윤필대사가 금오암(金鼇庵)으로 개칭하여 불러오다가, 남해의 수평선에서 솟아오르는 해돋이 광경이 아름다워 조선 숙종41년(1715년)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명명(命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효 스님 좌선대는 사각 지대에 있어서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내가 여길 발견하게 된 건 저 위에 올라 사진 찍던 사람 때문이었다.
중에 밑에서 보니 올라가지 말라고 줄도 쳐놨었는데;;;;;
하지만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난 항일암에 올라 계단을 따라다니면서도 저 바위는 못 봤겠지.
원효 스님께서는 먼 훗날 사람들이 이렇게 사진 찍을 줄 알았을까.;;; 어리석은 중생이라 죄송합니다.;;;
이 귀여운 부처상은 내려가는 계단에 더 큰 조각으로 있었다. 내 나름 추측은 안 좋은 말 듣지 말고, 안 좋은 것 보지 말고, 나쁜 말 하지 말라는 걸까, 였다.
나쁜 말 하지 말라는 건 맞았고, 귀를 막은 건 비방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라는 뜻, 눈을 가린 건 남의 잘못을 보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말이었다. ... 나 칭찬 좋아함. 안 좋은 말 들으면 의기소침해짐. 지난 일, 날 화나게 한 사람에 대해서 곱씹으며 에너지와 시간을 허비함. 크흑- ㅠ
원효 스님 좌선대가 내려보이는 곳에 소원 등, 소원 기와 등을 파는데 수능 기도, 취직 기도 등등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고민이 적힌 게 많았다. 거기 계신 분이 여기가 기도 명당이라며 권하셨다. 나중에 잘 되어서 다 덕분이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여수 여행을 오는 게 소원이었고, 소원은 이미 이뤘다. ^^
3. 항일암을 떠나려던 차, 택시 기사님이 10분만 오르면 전망대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오는 길에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거기가 맞는 것 같았다. 혹시 몰라 여기 계신 분에게 여쭈니 약간 자신없는 얼굴로 거기일 거라고 했다.
계단도 가파르고 높았고 중간중간 좀 무섭기도 했다.
게다가 이미 지쳐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꽃.여.자. (feat. 정대만)
오르고 또 오르니 기쁘지 아니한가.
대부분 여기는 모를 테고 알아도 선뜻 올라갈 결심을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항일암까지 오는데 이미 체력의 8할을 쓰게 되니 말이다. ...
그래서 그런지 오르내리는 내내 혼자였다.
낯선 산 계단을 혼자 오르자니 외롭기도, 무섭기도 했다. 몸도 너무나도 힘들었다.
하지만 걸을 수 있을 때 걸으리.
오를 수 있을 때 오르리.
걷세 걷세 젊어 걷세, 늙어지면 못 걷나니.
정상에서 본 풍경도, 오르면서 본 풍경도 너무나도 근사했고, 혼자 걷는 그 순간의, 몸은 힘들었으나 고즈넉했던 그 기분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전 여행들을 포함해서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
정상에서 잠시 쉬며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떠나기 전에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이번 주 내내 여수에서 비가 온다고 했다.
그런데 그냥 강행했다. 지금 못 가면 아예 못 갈 것 같았다.;;
모터보트를 탈 때도 운전 기사님이 다음 날인 이 날 비가 올 거라고 했다.
하지만 여행 내내 비를 보지 못했다. 마지막 날 잠결에 빗소리를 들은 게 전부였다.
항일암에서 얼핏 이야기를 들으니, 오늘 유독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내일 무슨 행사 때문이리라는 말도 들렸는데, 일기예보 상 비가 올 거라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덕분에 항일암을 비교적 한가하게 볼 수 있었다.
좋은 택시기사님 덕에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전망대에 와서 돌산도를 조망했다.
그리운 순간이다.(2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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