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때로 하루가 쳇바퀴처럼 굴러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 조금하고, 책 좀 읽으면 하루가 사라진다.
애정하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도 작업을 마치고 나면 오늘은 이만큼 했다는 성취감보다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한 우울감이 확 올 때가 있다.
이날이 그랬다. 오늘치 분량을 해낸 뒤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빨리 끝났다.
모처럼 생긴 여분 시간에 밀린 집안일 하고, 어제 읽던 책 이어 읽고 나면 밤이겠지, 싶어지며 급 울적해졌다.
여행 가고 싶다! -> 현재 상황에서 여행은 부담스럽다. -> 혹시 걸을만한 곳 있을까?
순서로 의식이 흘러갔다.
서울 시민이라 서울 자체가 '익숙한 곳'이라는 느낌을 줘서 그렇지, 서울에도 안 가본 곳 많지 않나.
순천 사는 사촌은 서울에 숙소 잡아 놀러온단 말이지.
그래서 서울 산책 코스를 찾다가 안산자락길을 발견했다.
좋아, 가자! 이미 늦은 오후지만, 안 가는 것보다는 가는 것이 나으리오.
지하철로 홍제 역에서 내려 4~50분 가량을 걸어서 진입로를 찾았다. 나중에야 네이버 지도 옵션에서 '등산로'를 켜면 다양한 진입로가 지도에 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진작 알았다면 홍제까지 갈 필요도, 어두워진 자락길에서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홍제에 간 덕에 맛난 음식도 먹었고, 덕분에 네이버 지도에서 '등산로' 옵션도 알았으니 괜찮다. 갸르갸르-
이리저리해서 홍대 쪽에 자주 가는 편이다. 홍제와 홍대는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홍대는 빨리 변하고 간판들도 다양하달지, 세련되었달지, 신상(?)같은 느낌을 준다. 홍제는 시장이나 여러 가게 간판들이 대체로 오래 된 스타일이랄까, 괜히 정감 가고 홍대에 익숙한 내게는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안산자락길에 도착했을 때가 거의 6시 반에서 7시 경이었다.
아직 낮이 긴 때라 밝았고, 간간이 걷는 사람들이 보여서 산길에 들어섰다. 봄철이면 꽃도 피고, 코스 중에 메타세쿼이어 길도 있다던데, 계절이 계절이라 꽃은 한 종류 밖에 못 봤고, 무턱대고 걷느라 메타세쿼이어 길은 가지 못했다.
그냥 들어선 길을 따라 가다 보니 차가 다녀도 좋을 넓은 아스팔트 길이 나왔지만 차와 자전거 모두 통행 금지였다. 걷다가 나무로 만든 두 명 정도 나란히 걸을 길이 나왔고 점점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야경을 즐기며 기분좋게 걸었다.
안산 정상 봉수대까지 1.1km 정도 남았다는 오르막 계단 앞에서 잠시 망설였으나, 해도 졌는데, 길이 어디까지 뻗었는지 모를 곳을 걷는 건 아무래도 부담이라 오르진 않았다. 아래쪽은 1킬로미터 정도, 홍제역 방향이라고 했다. 나는 가운데 길, 안산자락길을 더 걷기로 했다.
이날 원피스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정상까지는 조금 험해서 최소한 바지는 입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걷고, 걷고, 걷는데 빠르게 어둠살이 깔리기 시작했다. 어둠이 짙어지며 조명이 없기 때문에, 등산로를 만들어뒀다 해도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오가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데 기대서 계속 걸었다.
산길을 간다 말없이
홀로 산길을 간다
해는 져서 새소리
새소리 그치고
짐승의 발자취
그윽히 들리는
밤에 홀로 산길을
홀로 산길을 간다.
우리나라 가곡이다. 뜬금없이 어릴 때 아버지가 종종 부르던 이 가곡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추락 사고를 막기 위함인지 비탈 쪽에는 난간이 있었다. 한쪽은 산, 다른쪽은 난간. 어디까지 가야 안산에서 내려가는 길이 있을지 슬슬 불안해졌다.
앞에서 두 분이 걸어오다가 나를 지나쳤다. 용기를 내서 불렀다.
"이리로 가면 자락길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을까요?"
"네, 있긴 해요."
목소리를 들으니 여자분이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울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계속 걷다 보니 "있긴 해요."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나 가야 하는지 물어볼 걸.
결국 돌아섰다. 아까 본 홍제로 가는 길을 찾아 아래로 내려가기로 한 것. 그러다 어두워서 못 보고 지나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그래, 이만 내려가자! 문명으로 돌아갈 때가 왔도다.
어두워서 계단을 확인하기 힘들었다. 벌레가 몰릴 걸 각오하고 휴대전화 조명을 켰다. 크흑-
내려오니 아파트 단지와 맞닿은 진입로였다. 큰 산이니 진입로도 여럿이겠지, 왜 네이버 지도에 진입로가 안 뜰까? 여행 다닐 때마다 네이버 지도에 의지해왔는데! 크흑- 하며 의아해했더랬다. 안산자락길 검색할 때 나온 블로그에서는 분명 진입로가 있는 지도가 떴단 말이다! - 너님이 등산로 옵션을 안 켜서 그랬다. ... -
늦게 온 지라 얼마 못 걸어서 이대로 집에 가자니 섭섭했다. 내 영혼의 동반자 짬뽕이 먹고 싶었다. 아니면 달달한 디저트라거나...
디저트 가게를 검색해서 가는 길에 초등학생 아들 둘과 아빠로 보이는 세 명이 중국집 앞에 서서 자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지, 이 맛집의 아우라는?
지나가며 슬쩍 창문을 보니, 마침 창가에 앉은 분이 갓 나온 짬뽕을 시식중인데, 저 짬뽕 분명 맛있다, 라는 느낌이 뙇! 왔다.
이때가 8시 경이니, 디저트를 포장해 오면 자리가 날 것 같았다. 와돳!
하이드미플리즈, 라는 카페에 갔다. 디저트를 검색했을 때 뜬 딸기모카번, 얇은 빵 사이를 채운 크림을 본 순간, 크림성애자로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내부는 산뜻하고 밝은, 심플하면서 세련된 분위기였다. 노트북을 가지고 작업하는 분들도 보였다. 와, 여기서 커피 마시면서 놀면 좋겠;;지만 짬뽕 먹어야 함!
시간이 늦어서인지, 디저트 메뉴는 몇 종류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우유크림모카번으로 추정되는 걸 골랐다.
집에 가서 먹을 디저트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아까 본 중국집, '화란'으로 갔다.
줄 서는 맛집에 혼자 들어가려니 미안했는데, 다행히 반겨주셨고, 앞치마도 가져다 주시며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고마웠다.
화란짬뽕과 삼선짬뽕 중 잠시 고민. 내 취향은 삼선짬뽕이나 이 집에서는 가게 이름을 딴 화란짬뽕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짬뽕에 이과두주가 빠지면 섭섭하지. 여행다닐 때 내 소울푸드. 짬뽕과 이과두주를 시키니 세상이 내 것 같았다. 꺄하하하하-
보통 짬뽕 그릇보다 낮은 대신 넓어서, 담음새부터 먹음직스러웠다. 메뉴 설명에 삼겹살이 들어가 있다고 했는데, 육고기보다는 해산물 과라서 잠시 고민했던 것. 하지만 시그니처니까.
결론은, 정말 맛있었다! 은근한 매운맛과 깊이 있는 국물과 식감이 하나하나 살아있는 버섯과 아삭거리는 채소!
채소는 한 번 볶아서 끓여야 아삭한 식감이 살아 있다. 손이 한 번 더 간다는 거. 여기는 그렇게 한 거.
나는 면을 반만 달라고 했다. 그냥 시키면 저보다 더 봉긋할 수도 있다.
이과두주는 두 잔 마시고 남은 술은 챙겼다. 딱 두 잔만 마셔야 한다. 한 잔은 아쉽고, 세 잔은 취한다. .......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맛난 짬뽕을 먹고 행복하게 집에 와서 소중히 안고 온 디저트를 풀었다.
허어어어얼?? 크림이 아니었네????
와, 그 밝은 조명 아래에서, 왜 그걸 잘못 봤는지 모르겠다. 푸하-
잠봉뵈르도넛이라고 바삭한 빵 사이에 앙버터와 베이컨이 들어있는 브런치 겸 디저트였다. 푸하-
앙버터와 색이 옅은 베이컨을, 눈에 뭐가 씌웠는지 흰크림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와, 나 앙버터와 베이컨 취향 아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한참 웃었네.
냉장고에 넣었다가 다음 날 아점으로 먹음. ㅋ
유니크한 카페라는 느낌에 걸맞게, 맛있었다. 가벼운 짠맛과 부드러운 버터와 바삭한 빵의 식감이 잘 어울렸달까.
크림인 줄 모르고 샀지만, 결과는 흡족했다. ^^ (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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